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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2:45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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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태교 |
한글표제 | 태교 |
한자표제 | 胎敎 |
분야 | 왕실/왕실문화 |
유형 | 개념용어 |
집필자 | 김지영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태교(胎敎)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순조실록』16년 1월 21일, 『세종실록』6년 3월 23일, 『세조실록』2년 7월 23일, 『선조실록』8년 10월 25일 |
임신한 여성이 몸속 태아(胎兒)를 하나의 인격체로 여겨 행하는 태중 교육.
개설
태교는 임신한 여성이 임신 3개월부터 출산 전까지 태아를 위해 행하는 태중 교육을 일컫는다. 조선시대 태교는 임신한 여성의 행동과 마음을 삼가는[謹] 것과 관련된 다양한 금기들로 구성되어 있다. 즉, 태교에서 중시하였던 임신한 여성이 지켜야 할 금기 사항들은 의복, 음식, 의학적 처방, 수면, 노동, 장소(방향), 성생활, 자세 등 구체적인 일상생활의 영역에까지 미치고 있다.
특히 조선 왕실의 태교는 『열녀전(列女傳)』에 기록된 태임(太妊)의 태교에 기초하고 있다. 태임이 주나라 문왕(文王)을 임신했을 때 태교의 법을 잘 지켰기 때문에 문왕이 태어나면서부터 명철하였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조선 초기부터 왕실 여성들에게 태교는 매우 중시되었다. 왕실 여성들은 태임을 이상적인 여성으로 여기면서, 태임이 태교를 통해 성인(聖人)을 탄생시켰던 것과 동일하게 태교의 실천을 통해 성인군자(聖人君子)를 키워 내야 한다는 책임을 가졌다.
『열녀전』의 태교법은 조선 후기에는 『동의보감』의 태교법으로 더욱 구체화되었다.
내용 및 특징
조선시대 여성은 혼인 후 임신을 하면 출산할 때까지 조선 사회가 임신한 여성에게 요구하는 특별한 규칙과 금기 사항들을 지켜야 했다.
동아시아 사회에서 태아를 하나의 인격체로 여겨 태교에 주목한 것은 약 3천 년 전인 중국의 주나라 때부터다. 중국에서 태교에 관한 문헌 중 현전하는 가장 오래된 책은 가의(賈誼)의 『신서(新書)』로 알려져 있다. 여기에는 왕실의 태교법과 성왕의 어머니 읍강(邑姜)의 태교가 소개되어 있다. 주나라 읍강이 실천했던 태교는 여성의 행동과 감정을 최대한 조심하고 절제하는 것이었다.
중국에서 태교와 관련하여 주목 받은 책은 한나라 유향(劉向)이 여성 인물 106명에 관하여 열전 형식으로 저술한 책인 『열녀전』이다. 이 책은 주나라 왕실의 기틀을 세우는 데 적극적으로 동참한 주나라 왕실의 세 어머니를 지칭하는 ‘주실삼모(周室三母)’, 즉 태강(太姜)·태임(太妊)·태사(太姒)에 관한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다. 주나라를 건국한 문왕의 어머니인 태임은 태교를 잘했을 뿐만 아니라 시어머니 태강을 잘 섬기고, 며느리 태사를 잘 인도했다고 칭송되는 여성이다.
『열녀전』에는 “태임이 문왕을 임신하였을 때 눈으로는 나쁜 것을 보지 않았고, 귀로는 음란한 소리를 듣지 않았으며, 입으로는 오만한 말을 하지 않았다. 이처럼 태임은 태교를 잘하였다.” 하고 기록하였다. 태임의 태교는 사물을 지각하는 신체 기관인 눈(시각), 귀(청각), 그리고 내면을 표현하는 입(언어)을 조심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군자위(君子謂)’로 시작되는 유향의 보다 구체적인 태교론이 등장하는데 이는 다음과 같다. “태임은 태교를 잘하였다. 옛날에는 부인이 아이를 잉태하면 모로 눕지 않고, 모서리나 자리 끝에 앉지 않았으며, 외다리로 서지 않았고, 거친 음식을 먹지 않았다. 자른 것이 바르지 않으면 먹지 않았고, 자리가 바르지 않으면 앉지 않았다. 현란한 것을 보지 않았고, 음란한 음악은 듣지 않았다. 밤에는 눈 먼 악관(樂官)에게 시를 읊게 하였고, 올바른 이야기만 하게 하였다. 이와 같이 하여 자식을 낳으면, 모습이 반듯하고 재덕이 남보다 뛰어난 법이다. 그러므로 아이를 가졌을 때 반드시 감정을 신중히 해야 한다. 선하게 느끼면 아이도 선하게 되고, 나쁘게 느끼면 아이도 악하게 된다. 사람이 태어나 부모를 닮는 것은 모두 그 어머니가 밖에서 느끼는 것이 태아에게 전해진 까닭이다. 그러므로 아이의 모습과 마음이 부모를 닮게 되는 것이다. 문왕의 어머니는 자식이 부모를 닮게 되는 이치를 알았다고 할 수 있다.” 유향이 보다 구체화시킨 태교의 내용은 임신한 여성이 삼가야 할 행동과 삼가야 할 음식, 삼가야 할 소리 등 금기 사항들이 주를 이루었다. 그리고 보다 적극적인 태교로서 밤에 눈먼 악관에게 시를 읊게 하고, 올바른 이야기만 하게 하였다. 그리고 임신한 여성의 감정이 태아에게 미치는 영향이 강조되면서, 여성 스스로 임신 중에 감정을 신중히 할 것을 권하였다.
동아시아 사회, 특별히 조선 사회에서 ‘태교’로 일컬어지는 임신한 여성이 지켜야 할 모든 금기 사항과 규칙은 건강하고 명철한 아이를 낳기 위한 전략일 뿐만 아니라, 혹시 일어날 수 있는 불행에 대하여 산모와 태아를 보호하기 위한 일종의 안전장치였다.
변천
중국주나라 문왕의 어머니인 태임은 조선시대 왕실 여성에게도 이상적인 여성상이었다(『순조실록』16년 1월 21일). 1475년(성종 6) 소혜왕후(昭惠王后)가 처음으로 『내훈(內訓)』이라는 여훈서(女訓書)를 편집하였는데, 이후 조선 후기까지 모두 5차례에 걸쳐 재간행 되었다. 『내훈』은 조선 사회의 왕실 여성뿐만 아니라 양반 여성들의 필독서였다. 『내훈』「모의장(母儀章)」에 나오는 태교 또한 『열녀전』을 그대로 인용하고 있다. 따라서 『열녀전』에 기록된 태임의 태교는 조선 사회에서 통용되던 태교의 연원이었다. 그리고 조선 후기에 등장하는 다양한 여훈서에 기록된 태교 관련 내용들은 『열녀전』의 내용을 요약한 정도였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세종과 소혜왕후의 맏딸로 태어난 정소공주(貞昭公主)의 묘지명(墓誌銘)에 태교에 대한 언급이 처음으로 등장한다(『세종실록』6년 3월 23일). 소혜왕후가 공주를 임신하였을 때, 일찍부터 태교에 힘써서 공주가 덕도 있고, 용모도 뛰어났다는 내용이다. 세조 또한 흥녕부대부인(興寧府大夫人)에게 올리는 전(奠)에서 장모의 태교로 덕 있는 정희왕후(貞熹王后)가 태어났고, 그녀를 자신의 배필로 맞이하여 집과 나라가 편안하게 되고, 자손들도 보전하게 되었다고 고백하면서, 이 모든 것이 장모의 태교에서 비롯되었다고 하였다(『세조실록』2년 7월 23일).
사람의 기품이 왜 다른가에 대한 선조의 질문에 유희춘(柳希春)은 임신한 여성의 태교와 사람의 품성과의 상관관계에 대하여 설명하였다. 인간은 부조(父祖)의 기(氣), 생모(生母)의 기, 산수(山水)와 풍토(風土)의 기, 천시(天時)의 기를 받아서 태어나는데, 임신 3개월이 될 무렵부터 변화가 생긴다는 점을 지적하였다(『선조실록』8년 10월 25일). 즉, 조선시대에는 현명한 자손을 얻기 위해 임신한 여성들은 임신 3개월부터 태교에 힘썼다.
한국학중앙연구원장서각 소장 『(한글본)동의보감』은 왕실 여성을 위해 제작된 것으로, 연경당(延慶堂)의 한글 자료 목록인 『연경당서책목록』에도 포함되어 있다. 이는 실제 왕실의 여성들이 임신, 출산, 육아와 관련된 의학 지식을 습득하는 데 17세기에 편찬된 허준(許浚)의 『동의보감』을 중요한 의학 서적으로 여기고, 이를 탐독했음을 잘 보여 준다. 허준의 『동의보감』에는 임신 중 하지 말아야 할 행동, 먹지 말아야 할 음식과 약물 등에 관하여도 비교적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열녀전』에 기록된 태교와 비교했을 때 임신한 여성의 몸 상태를 고려한 다양한 의학적 금기들이 구체적으로 등장한다.
특별히 음식의 경우, 태아의 건강 상태뿐만 아니라 난산과 유산의 위험, 아이의 신체상의 결함 등과 직접적으로 연결된다고 인식하였다. 따라서 특별히 먹으면 안 되는 음식들과 약물을 정하여 두고, 임신한 여성이 음식 금기를 지키도록 하였다. 실제로 금기 음식들은 대부분은 임신한 여성에게 해로운 것이었고, 약물의 경우에도 독성을 함유하고 있거나 약물의 성질이 뜨겁거나 찬 것들이었다. 그 가운데 자라고기를 먹으면 아이의 목이 짧게 된다거나 토끼고기를 먹으면 언청이로 태어난다는 생각은 사물의 의미를 해석하는 데 있어서 비슷한 것이 비슷한 것을 낳는다는 전통시대의 유감주술(類感呪術, homoeopathic magic)적인 사고방식이 그대로 투영된 것이다.
음식 금기와 함께 중요하게 고려된 사항은 태살(胎殺)이 있는 방위를 피하는 것이었다. 태살은 월과 일에 따라 태아에 해를 끼치는 기운이 일정한 장소에 깃들어 있다는 신념에서 나온 것이다. 태살은 왕실 여성의 금기와 관련하여 특히 신경을 많이 썼던 부분이다. 19세기에 작성된 『산실청총규(産室廳總規)』에 의하면, 산실(産室)을 배설하면서 동시에 길방(吉方)과 금기 절차를 적은 ‘진언첩책(眞諺帖冊)’을 왕과 왕비에게 각각 올리도록 하였다. 출산이 임박할수록 태살 방위에 대한 금기들이 맞물려서 임신한 여성이 더욱 근신하도록 하였다. 태살을 피하지 않으면 태아의 신체에 문제가 생기거나 태아가 죽을 수도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참고문헌
- 『産室廳總規』(일본 武田科學財團 杏雨書屋 소장)
- 「임산예지법(臨産預知法)」(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소장, K6-4(861))
- 신동원·김남일·여인석, 『(한 권으로 읽는) 동의보감』, 들녘, 2006.
- 유향 저, 이숙인 역, 『열녀전-중국 고대의 106 여인 이야기』, 예문서원, 1997.
- 김지영, 『조선 왕실의 출산 문화 연구-역사인류학적 접근』,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10.
- 강명자·송병기, 「태교에 관한 문헌적 고찰-음식을 중심으로」, 『대한 한방 부인과학회지』1, 1987.
- 이경하, 「『내훈』과 ‘소학·열녀·여교(女敎)·명감(明鑑)’의 관계 재고」, 『한국 고전 여성문학 연구』7, 2008.
- 이래호, 「한글본 동의보감의 국어학적 연구」, 『장서각』21, 2009.
- 정해은, 「조선시대 태교 담론에서 바라본 이사주당의 태교론」, 『여성과 역사』10,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