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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2:44 기준 최신판



당악(唐樂)이 유입되기 이전부터 현재까지 전승되는 우리나라 고유의 음악.

개설

향악(鄕樂)은 우리나라에 전해지고 있는 고유한 음악을 포함하여 삼국시대에 우리나라에 들어와 토착화된 서역(西域) 지방의 음악과 불교음악까지 아우르는 용어이다. 삼국시대에 우리나라에 당악이 유입되면서 그에 상대되는 개념으로 향악이란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하였고, 고려시대에는 향악이란 용어 대신 속악(俗樂)이라 쓰기도 했다.

내용 및 특징

향악이라는 용어의 ‘향(鄕)’에서 지역적 한계를 규정하는 듯 보이지만 우리나라의 향악은 우리 고유의 토착 음악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서역 지방을 통해 우리나라에 들어온 외래 음악까지 아우르므로 보다 개방적인 성격을 지닌 용어임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 문헌 중 향악이란 용어가 처음 나오는 것은 신라말기에 최치원(崔致遠)이 지은 다섯 수의 한시 향악잡영오수(鄕樂雜詠五首)이다. 이 시는 신라시대에 전해지고 있는 다섯 가지 연희인 신라오기(新羅五伎)에 관해 지은 것으로 ‘금환(金丸)’, ‘월전(月顚)’, ‘대면(大面)’, ‘속독(束毒)’, ‘산예(狻猊)’의 다섯 작품을 말하는데 최치원이 이러한 연희를 ‘향악’이라 규정함으로써 향악의 의미와 범위를 알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신라오기는 향악이라 표현하고 있지만 신라 고유의 것만을 포함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서역 지방 등에서 유입되어 신라에서 토착화 과정을 겪은 것이 있다. 사자춤인 ‘산예’가 곧 서역 지방에 기원을 둔 것이다. 또 ‘금환’은 한(漢)의 산악(散樂)으로 유입된 것이므로 우리 향악의 범주에는 이미 외래의 것을 포함하고 있음이 확인된다. 악기 가운데 서역 지방에서 기원을 둔 다섯 줄의 직경(直頸) 악기인 오현비파를 향비파(鄕琵琶)라 하여 향악기의 범주에 포함시키는 것에 반해 중국에서 유입된 네 줄의 곡경(曲頸) 악기인 사현비파를 당비파(唐琵琶)라 구분하는 것에서도 그러한 전통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에는 궁중음악은 속악이라 하였는데, 이때의 속악은 향악의 의미로 쓰였다. 고려의 향악은 통일신라에서 전승된 삼국 속악과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향악으로 되어있는데, 신라 전승의 ‘동경(東京)’, ‘여나산(余那山)’, ‘이견대(利見臺)’, 백제 전승의 ‘선운산(禪雲山)’, ‘무등산(無等山)’, ‘방등산(方等山)’, ‘정읍(井邑)’, ‘지이산(智異山)’, 고구려 전승의 ‘내원성(來遠城)’, ‘연양(延陽)’, ‘명주(溟州)’ 등은 삼국속악이며 ‘무고(舞鼓)’, ‘동동(動動)’, ‘서경(西京)’, ‘대동강(大同江)’, ‘오관산(五冠山)’, ‘장단(長湍)’, ‘금강성(金剛城)’, ‘거사련(居士戀)’ 등은 고려 속악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우리나라 음악의 갈래는 고려시대에 세 갈래로 정착되었는데 향악은 그중 하나이다. 향악에 대칭되는 의미로 삼국시대 이후 유입된 당악과 고려 예종 때에 유입된 아악(雅樂)이 그것이다. 고려에 이어 조선시대에도 향악은 아악, 당악과 함께 지속되었는데, 조선전기의 향악은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개창한 업적을 칭송하는 내용으로 된 악장(樂章)이 제작되고 그 악장을 노래 선율에 얹어 부르는 음악 제작으로 대표된다. 이때 노랫말은 새롭게 제작되었지만 선율은 고려시대의 것을 대부분 그대로 사용하였다.

세종대에 이르면 향악은 더욱 발전을 보인다. 특히 세종은 향악과 고취악을 바탕으로 음악들을 만들었는데, 회례 악무로 제정된 ‘정대업’과 ‘보태평’이 그러한 작업의 결실이다. ‘발상’ · ‘봉래의’ · ‘전인자’ · ‘여민락’ · ‘치화평’ · ‘취풍형’ · ‘후인자’ 등의 음악도 향악에 속한다. ‘정대업’과 ‘보태평’은 이후 세조대에 종묘제례악으로 제정되어 향악을 대표하는 음악이 되었다.

한편 궁중 행사에 사용된 우리나라의 전통음악과 무용을 향악정재라고 한다. 성종 연간에 편찬된 『악학궤범』에는 ‘보태평’과 ‘정대업’을 비롯해, ‘봉래의’ · ‘아박’ · ‘향발’ · ‘무고’ · ‘학무’ · ‘학·연화대·처용무합설’ · ‘교방가요’ · ‘문덕곡’ 등 10종이 기록되어 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향악의 개념은 시간이 지날수록 그 고유성이 약화되었다. 특히 궁중음악을 연주할 때 향악과 당악을 교대로 연주하는 교주(交奏) 현상이 나타나면서 향악과 당악이 섞이는 경향이 심화되었다. 당악에 속하는 음악이지만 향악기를 많이 포함시켜 연주하거나, 반대로 향악에 속하는 음악이지만 당악기를 많이 포함시켜 연주하는 전통이 보편화되었다. 조선시대 후기 이후에는 향악이 조선시대에 우리나라에서 발생한 여러 음악을 모두 포괄하지 못하는, 음악의 역사적 형성 과정을 알려주는 정도의 한정된 명칭으로 존속하게 되었다.

변천

그 기원의 외래·토착성을 배제하고 우리나라에 들어와 토착화된 음악과 우리 고유의 음악을 향악이라 부르는 전통은 향악에 대비되는 개념으로서의 당악이 우리나라에 등장하기 시작한 이후 쓰였다. 고려시대에 향악은 속악이라 쓰기도 했으며 우방악(右方樂)이라는 범주에 넣어 설명하기도 했다. 조선시대에도 향악을 속악으로 표현하는 전통은 여전히 유지되었다.

참고문헌

  • 『삼국사기(三國史記)』
  • 『삼국유사(三國遺事)』
  • 『악학궤범(樂學軌範)』
  • 『최문창후전집(崔文昌侯全集)』
  • 송방송, 『증보한국음악통사』, 민속원, 2007.
  • 장사훈, 『韓國音樂史』, 세광출판사,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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