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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2:43 기준 최신판



조선시대 소속 관서나 주인집의 호적이나 노비안 등 명부에 등재된 노비 명단.

개설

화명(花名)은 어떤 장부에 등재된 인명을 광범위하게 지칭하는 용어이나, 조선시대에는 주로 노비 명단을 가리키는 데에 쓰였다. 양반의 재산 목록을 나열할 때 전답문권(田畓文券)과 함께 화명기(花名記)가 등장하는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노비와 토지로 대표되는 양반의 주요 재산 물목이 이 두 가지이기 때문이다.

내용 및 특징

노비 명단에 왜 ‘화(花)’자를 넣었는지는 분명히 알 수 없으나 중국의 용례로부터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높다. 일례로 한어대사전에서 ‘동문록(同門錄)’은 ‘과거 시험에 동과(同科)한 사람의 화명책(花名冊)’으로 풀이되어 있다. 이때 화명은 명단 또는 인명의 의미로 쓰였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 화명의 용례는 모든 명단을 의미했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노비에만 국한되지는 않았던 것이다.

광해군대에 누르하치[奴酋]의 침략에 대한 대비책으로 비변사가 면포 10동(同)을 감사와 병사에게 내려 보내어 토병(土兵)에게 시사(試射), 즉 활쏘기 시험을 본 후 나눠주고 그 화명(花名)을 보고하도록 건의한 기사가 있다(『광해군일기』 즉위년 8월 17일). 여기서는 활쏘기 시험을 통해 면포를 하사 받은 토병의 명단이 곧 화명으로 쓰이고 있다. 또 단종대에 요동에서 탈취한 인구의 명단을 화명으로 지칭한 용례도 있다(『단종실록』 즉위년 9월 10일).

그러나 노비 명단이나 명부 등을 지칭한 사례가 가장 많다. 노비 쟁송 시에 족친이 사용하는 노비를 화명(花名)을 늘려서 속이고 입안(立案) 받는 경우 이를 논죄하도록 한 노비 판결 규정은(『태종실록』 5년 9월 6일), 조선초기 사노비에 있어서 화명이 노비 명단 또는 명부로 쓰인 대표적인 사례이다.

공노비의 경우 중앙 관서와 외방 주현에 있는 노비 명단을 화명으로 칭하였다. 의정부에서 보고한 천적(賤籍) 관리 방안 중 경중(京中)의 소속 관서와 외방의 거주 고을에 있는 노비 화명을 보고하게 하여 이를 토대로 성적(成籍)하게 한 내용을 통해 알 수 있다(『태종실록』 14년 4월 2일). 즉 화명은 천적 작성의 토대가 되는 공노비 명단을 의미한 것이다.

사가(私家)의 고문서에서는 1480년(성종 11)에 작성된 안동오천김씨가(烏川金氏家)의 입안에서 화명의 용례를 찾을 수 있다. 이 입안에는 이미 분재(分財)한 노비를 예안관(禮安官)에게 공증 받은 문서를 인용하면서 이를 ‘노비화명건기(奴婢花名件記)’로 지칭하고 있다. 이는 노비 명단을 나열한 일종의 노비안(奴婢案)을 지칭한 것이라 볼 수 있다. 1684년(숙종 10)에 작성된 전라남도 영광의 영월 신씨가의 ‘갑자도노비화명(甲子都奴婢花名)’이라는 문건 역시 같은 의미로 쓰였다. 즉 갑자년에 이 집안이 소유하고 있는 모든 노비의 명단을 의미하므로 요약하면 ‘갑자년 노비안’ 정도가 될 것이다. 이처럼 지역과 시기를 불문하고 사가에서는 화명을 노비안의 의미로 사용하였다.

요컨대 화명은 협의로는 노비 명단을 의미하는 경우가 가장 많으며, 조선후기까지도 그러한 뜻으로 사용된 용례가 많이 발견된다. 하지만 원래는 노비에 국한되지 않고 토병의 명단, 인질의 명단, 동방(同榜) 명단 등 다양한 명단류에 쓰였다. 조선의 강고한 신분제 하에서 최하층에 존재했고, 타인의 재산으로서 소유·매매되어 사물로 취급되던 노비의 명단에 ‘화(花)’자를 넣은 것이 매우 이채롭다고 하겠다.

변천

고려시대나 그 이전의 관찬 기록에서는 화명이라는 용어가 잘 보이지 않는다. 조선시대 이전에는 노비의 명부를 가리키는 화명이라는 말을 잘 쓰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조선초기부터 노비 명단, 광의로는 다양한 명부를 의미하는 용어로 조선후기까지 꾸준히 사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참고문헌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이수건 편, 『경북 지방 고문서 집성』, 영남대학교출판부, 1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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