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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2:43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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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효자도 |
한글표제 | 효자도 |
한자표제 | 孝子圖 |
관련어 | 감계화(鑑戒畵), 고사인물화(故事人物畵),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 오륜행실도(五倫行實圖), 이십사효도(二十四孝圖), 효행록(孝行錄) |
분야 | 문화/예술/미술 |
유형 | 개념용어 |
집필자 | 신선영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효자도(孝子圖)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태종실록』 13년 12월 30일, 『세종실록』 10년 10월 3일, 『세종실록』 15년 3월 25일, 『명종실록』 즉위년 7월 21일 |
효(孝) 이념을 실천한 효자들의 이야기를 그린 고사인물화.
개설
조선시대 유교 이념 중 ‘효’는 부모와 조상에 대한 개인윤리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충(忠)’의 기초를 이루는 것으로 국가 통치의 가장 기본적 이념으로 인식되었다. 이와 같이 중요한 효 이념을 백성들에게 널리 보급하기 위한 국가적 사업으로 『효경(孝經)』, 『소학(小學)』과 같은 윤리서와 효 이념을 알기 쉽게 전달하기 위해 효자들의 이야기가 도설로 실려 있는 『삼강행실도』나 『오륜행실도』를 간행하여 반포하였다. 더욱이 왕이나 왕손들은 효자도를 병풍으로 꾸며 가까이 두고 효의 이념을 실천하고자 하였다. 조선시대 효자도는 무일도(無逸圖), 빈풍도(豳風圖), 경직도(耕織圖) 등과 함께 유교 이념의 대표적인 시각적 표상으로 중요시되었다.
내용 및 특징
중국에서는 2세기경 한대(漢代) 무량사(武梁祠) 화상석(畵像石)에서 효자의 이야기를 담은 그림이 확인된다. 당대(唐代) 화론가(畵論家) 장언원(張彦遠)의 『역대명화기(歷代名畵記)』에는 남조(南朝) 송(宋)의 화가 사치(謝稚)가 ‘효자도(孝子圖)’를 그렸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당대 이후 대표적인 24명의 효자 이야기인 ‘이십사효(二十四孝)’ 전통이 확립되었고 이에 의거하여 ‘이십사효도(二十四孝圖)’가 다양한 형식으로 전개되었다.
우리나라에서도 고려시대에 편찬된 『효행록』을 통해 중국의 ‘이십사효도’가 전해졌던 사실을 알 수 있다. 즉 고려 충목왕 때에 권보(權溥)가 아들 권준(權準)과 함께 중국 역대의 효자 64명의 자료를 수집하여 그 사위 이제현(李齊賢)에게 찬(贊)을 짓게 하고 이름을 『효행록』이라 하였는데, 이것이 세간에 유포되었다. 이때 권준은 화공(畵工)에게 중국의 이름난 효자 24명의 전기를 그림으로 그리게 하였다고 한다.
이때 제작된 『효행록』은 이후 제작되는 조선시대 효자도에 지속적인 영향을 끼쳤다. 1413년(태종 13)에 태종은 왕세자 교육을 담당하던 서연관(書筵官)에게 『효행록』에서 발췌하여 병풍을 만들게 하고는, 이제현에게 찬을 쓰고 권근(權近)에게 주를 쓰게 하였다. 태종은 병풍이 완성되자 당시 세자였던 충녕대군에게 그 뜻을 풀이하라고 시켰다(『태종실록』 13년 12월 30일). 이 기록으로 미루어 보아 조선초기 왕실에서 병풍 형태의 효자도를 제작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세종은 1428년(세종 10)에 김화(金禾)가 부친을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세상에 효행의 풍습을 널리 알릴 수 있는 서적을 만들어서 백성들을 교화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세종은 직제학(直提學)설순(偰循)에게 명하여, 이전에 편찬한 『효행록』에 실린 24인 외에 중국의 효자 20여 명과 삼국과 고려의 효자 이야기를 수집하여 한 책으로 편찬할 것을 명하였다(『세종실록』 10년 10월 3일). 이전까지 편찬된 효행록에는 우리나라 인물이 한 명도 없었다. 그런데 이때 세종의 명으로 우리나라 효자 이야기가 담긴 효자도가 처음으로 제작된 것이다.
세종은 『효행록』에 근거하여 1431년 『삼강행실도』의 간행을 지시하였다. 『삼강행실도』는 효자, 충신, 열녀의 이야기로 구성되었는데, 이 책에 우리나라에 현전하는 가장 오래된 효자도가 포함되어 있다. 1434년(세종 16) 4월에 반포된 『삼강행실도』의 체재는 도(圖), 전(傳), 시찬(詩贊)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효자도는 110개의 고사를 수록하였고 이 중 한국 고사는 21개이다.
『삼강행실도』는 세종판(1434년)을 시작으로 성종판(1490년), 선조판(1579년), 영조판(1726년) 등 지속적으로 복각되었고, 『속삼강행실도』(1514년), 『동국신속삼강행실도』(1617년), 『오륜행실도』(1797년) 등과 같이 효자도를 포함한 행실도류 판화가 조선시대 내내 중요시되어 제작되었다. 판화는 많은 양을 한꺼번에 제작할 수 있었으므로 일반 백성에게 배포하는 효자도는 주로 판화 형식이 선호되었다.
왕실에서는 효자도를 병풍으로 제작하여 가까이 두고 효의 이념을 되새기며 실천하고자 하였다. 1433년(세종 15) 세종이 온수현(溫水縣) 온천에 행차할 때 경기감사남지(南智), 경력황수신(黃守身), 광주목사어중연(魚仲淵) 등이 동궁에게 효자도병풍(孝子圖屛風)을 올렸다는 기록이 전한다(『세종실록』 15년 3월 25일). 1545년(명종 즉위) 명종도 역시 침전(寢殿)에 경직도, 계언 병풍 등과 함께 효자도병풍을 항상 진설해 놓고 보았으며(『명종실록』 즉위년 7월 21일), 정조도 어렸을 때부터 효자도 그림 보기를 좋아하고 그림 속의 옛날 효자들이 했던 일들을 흉내 내면서 즐거움으로 삼았다고 한다.
참고문헌
- 정병모, 『한국의 풍속화』, 한길아트, 2000.
- 송일기·이태호, 「조선시대 ‘행실도’ 판본 및 판화에 관한 연구」, 『서지학연구』 21, 서지학회, 2001.
- 송일기·이태호, 「초편본 『삼강행실효자도』의 편찬과정 및 판화양식에 관한 연구」 25, 서지학회, 2003.
- 이수경, 「조선시대 효자도-행실도류 효자도를 중심으로」, 『미술사학연구』 242·243, 한국미술사학회,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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