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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2:43 기준 최신판



미개간지나 휴경지(休耕地)를 새로이 경작할 때 불을 놓아 잡목(雜木)과 야초(野草)를 태워버리고 경작하는 방법.

개설

화경(火耕)은 농업생산이 시작된 이래 경작에 활용된 농경기술이다. 미개간지를 처음 개간하여 경작에 활용하거나, 예전에 경작하다가 내버려둔 곳을 다시 경작할 때, 전토(田土)에 자라고 있는 풀과 잡목을 불태우고 갈아주는 것을 화경이라고 한다. 화경 과정에서 불타버리고 남은 풀과 잡목의 재는 훌륭한 시비재료이기 때문에 농사짓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또한 화경을 하기 이전에 작물을 경작하지 않았기 때문에 토양에 부식물이 풍부하게 축적되어 있어 새로 경작한 뒤 몇 해 동안은 작물의 생육이 양호하게 이루어졌다. 이러한 화경에 의해서 농사를 짓는 것을 화전농업이라고 부른다.

내용 및 특징

화경은 우리나라 농경의 시작과 관련된 경작기술이다. 우리나라에서 농경이 시작된 것은 신석기시대 후반인데, 화경을 활용하는 농경법으로 농사를 지었다. 이때 화경과 관련된 농기구로 보습과 삽, 괭이 등을 활용하고 있었다. 돌도끼로 숲이나 덤불 등의 나무, 관목 등을 베어 말리고 불태워 경작지를 마련하는 방식이었다. 그리고 재가 사라지기 전에 돌보습이나 돌따비로 땅을 갈았고, 끝이 뾰족한 나무막대기인 굴봉이나 돌괭이 또는 뼈괭이로 파종 구멍을 파서 씨를 뿌렸다. 작물이 자라서 익으면 돌낫으로 이삭을 따서 수확하였다.

화경 방식으로 농사를 짓던 농경지는 1~2년 정도 경작지로 활용되었고, 이어서 다년간 농사를 짓지 않는 휴경지 상태로 내버려두었다. 나무를 태워서 생긴 재는 그 자체가 훌륭한 비료이기 때문에 땅을 깊이 갈아주거나 따로 거름을 넣어주지 않아도 괜찮았다. 조와 기장 등 잡곡 농사를 중심으로 농사를 지었다. 화경을 농경법으로 채택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정한 간격을 두고 경작지를 옮겨 다녀야 했다.

화경으로 경작지로 활용하는 땅을 어떠한 방식으로 선택하는가에 따라 유랑화전농업(流浪火田農業)과 정착화전농업(定着火田農業)으로 구별된다. 전자는 작물재배를 계속하여 지력이 수탈되면 다시 다른 장소로 이동하여 새로운 화전(火田)을 개척하므로 이것을 전경화전농업(轉耕火田農業)이라고도 한다. 화전으로 개척할 대상지가 많은 데 반하여 인구가 적으면 전경하는 것이 가능하였다. 반면 인구가 증가하고 화전으로 개척할 대상지가 적어지면 전경이 곤란해지므로 일정한 곳에 정착하여 화전을 경작하는 정착화전농업으로 전환할 수밖에 없었다. 정착경작을 하면 지력의 소모가 문제가 되므로 지력이 소모되면 일단 휴경하였다가 지력의 회복을 기다려서 다시 불을 놓고 경작하는 것인데 이와 같이 휴경과 경작을 엇바꿔서 하는 경우를 윤경(輪耕)이라고 한다.

화전의 경우에는 초기에는 비옥한 땅에 알맞은 감자 따위의 작물, 다음에는 보통 토양에 알맞은 조, 나중에는 척박한 땅에 적응하는 귀리 따위로 작물 종류를 선택하는 등의 배려와 함께 콩·팥 등의 콩과 작물을 재배하여 지력의 소모를 완화하는 데에도 노력하여야 했다.

변천

화경은 화전을 만들어 경작하는 경우 이외에 작물을 일반적으로 재배할 때 활용되기도 하였다. 풀을 경작지에 깔아놓고 불을 놓아 태운 다음 재가 아직 흩어지지 않았을 때 기경하는 방식이 동원되고 있었다. 『농사직설』에 따르면 대소맥, 서속(黍粟) 등 잡곡 농사를 위한 기경 작업에 미리 베어둔 풀을 태우는 방법을 동원하여 화경의 원리를 채택하고 있었다.

화경으로 화전을 조성하는 방식은 특히 조선후기에 크게 나타났다. 조선후기에 이르면 일반 평지 가운데 개간 가능한 곳의 개간이 거의 마무리되면서 화전이 크게 성행하였다. 17세기 후반 이후 개간의 진전은 특히 산화전(山火田)이라는 전토의 명목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전국의 산이 화전의 급류에 휩쓸리면서 산요(山腰) 이상 즉 산허리 이상의 비탈 지역까지 개간의 손길이 미치고 있었다. 산화전의 개발이 주요한 개간의 방식으로 고정화된 추세는 결국 개간 가능 지역의 축소에 그 원인이 있었다. 산화전의 개간은 1720년에 시행된 경자양전(庚子量田) 과정에서도 양안(量案)에 어떠한 방식으로 수록할 것인가의 문제로 논란이 벌어지고 있었다. 당시 경상좌도에서 양전(量田)을 담당하였던 균전사가 만든 사절목(私節目)에서도 산요 이하의 산화전을 양안에 입록하도록 타량(打量)할 것을 규정하고 있었다.

산화전은 산록의 초목을 사라지게 하기 때문에 수리시설이 제대로 기능할 수 없게 만드는 원흉으로 지목되고 있었다. 즉 초목이 산록에서 사라지면서 토사(土砂)가 흘러내려 천거(川渠)를 메워버리거나, 전토보다 하천의 하상(河床)이 높아지게 하였던 것이다. 이에 따라 산전 화경이 가져다주는 자그마한 이득인 시비효과를 노리는 게으른 농민 때문에 수리시설의 효용성이 감소되고, 결국 가뭄의 피해에 직접적으로 노출되게 만들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었다.

의의

화경은 농경이 시작될 당시 통용된 경작지를 확보하는 방법이었다. 그리고 풀이나 잡목을 불태우는 방식은 시비의 한 방법으로 동원되었다. 또한 산전을 경작하는 방식이 바로 화경이었다. 따라서 화경이라는 기술 속에는 농경의 시작, 시비, 개간 등 여러 가지 농업생산의 요소들이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 金容燮, 『朝鮮後期農學史硏究』 一潮閣, 1988.
  • 김용섭, 『증보판 조선후기 농업사연구』Ⅱ, 일조각, 1988.
  • 李景植, 「조선후기 火田농업과 收稅문제」, 『한국문화』10, 서울대학교 한국문화연구소, 1989.
  • 이태진, 「朝鮮初期의 火耕 금지」, 『이재룡박사환력기념한국사학논총』, 1990.
  • 국사편찬위원회 홈페이지(http://history.go.kr) 시소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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