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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2:42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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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탑본 |
한글표제 | 탑본 |
한자표제 | 榻本 |
분야 | 문화/예술/미술 |
유형 | 개념용어 |
집필자 | 김희정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탑본(榻本)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정조실록』 19년 5월 11일 |
금석이나 목판에 새겨진 글자나 그림을 원형 그대로 찍어낸 것.
개설
탑본(榻本)은 일반적으로 탁본(拓本)이라고 하며, 간혹 타본(打本)이라고도 한다. 탁본은 오늘날 인쇄나 복사, 사진처럼 원본을 재현하려는 목적에서 이루어졌다. 비석이나 갑골문, 청동기, 목판 등에 있는 글씨나 그림을 원형 그대로 찍어내어 보존하고, 임모나 감상을 위해 고안된 방법 중 하나이다. 서화의 학습과 감상뿐만 아니라 금석학 연구에 귀중한 의미가 있다.
내용 및 특징
탑본은 인쇄술의 선구라 할 수 있다. 재료가 갑골문이든, 청동기든, 석판이나 목판이든 탑본을 뜨는 것과 조판 인쇄는 모두 조각된 사물의 표면에 있는 글씨나 그림을 종이에 찍어낸다는 점에서 같은 원리이기 때문이다. 차이라면 조각하는 과정과 찍어내는 방법이 다를 뿐이다. 탑본은 대개 음각으로 찍는 반면 인쇄는 양각으로 찍는다. 탑본은 대상에 종이를 덮어 붙인 다음 솜방망이에 먹을 묻혀 지면 위를 두드려 본을 뜬다. 반면 인쇄는 대상 위에 먹을 바르고 그 위에 종이를 덮은 다음 종이를 문지르거나 판을 눌러 목판 위에 거꾸로 된 글자를 똑바로 나오도록 찍는다.
탑본의 종류는 탁을 하는 방법에 따라 습탁(濕拓)과 건탁(乾拓)으로 나누고, 모양에 따라 오금탁(烏金拓)과 선시탁(蟬翅拓), 격마탁(隔麻拓)으로 분류한다. 습탁은 대상물에 종이를 대고 물을 뿌려 부착한 다음 마르기 전에 솜방망이에 먹물을 묻혀 가볍게 두들겨서 문자나 그림이 드러나게 하는 방법으로 탑본에서 주로 쓰인다. 건탁은 대상물에 종이를 부착시킨 다음 파인 부분 주위를 먹으로 천천히 문질러서 파인 부분이 드러나게 하는 방법이다. 탁본은 대개 습탁을 많이 한다. 오금탁이란 문자나 문양이 새겨진 곳 이외의 종이면 전체가 까마귀처럼 새까맣고 번들거리게 하는 방법으로, 각첩(刻帖)같이 표면이 매끈한 것을 탑본할 때 주로 쓰인다. 선시탁이란 선익탁(蟬翼拓)이라고도 한다. 먹을 엷게 하고 발이 굵은 솜방망이를 사용하여 두들겨 만들어 탑본된 형태가 마치 매미 날개처럼 작고 촘촘한 공백이 생기게 하는 방법으로, 표면이 약간 거친 곳에 많이 쓰인다. 격마탁은 마애같이 거친 대상에 주로 사용하는 방법으로, 마치 삼이나 칡의 줄기처럼 거친 모양으로 나타나는 것을 말한다.
변천
탑본의 기원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현존하는 탑본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 수대(隋代) 황실도서관에 소장된 탑본이다. 『수서(隋書)』 「경적지(經籍志)」에 진시황순수비 회계각석 탑본 1권, 희평석경 잔문 34권, 희평석경 17권, 양대(梁代) 황실에서 소장하고 있던 석각문자 등이 기록되어 있다. 이로써 수대 이전에 이미 탑본이 행해졌음을 알 수 있다. 석각 문자를 탑본하는 기술은 당대(唐代)에 더욱 발전하였으며, 궁중에 전문적으로 탑본을 하는 탁서수(拓書手)를 고용하였다. 『대당육전(大唐六典)』에 숭문간에 탁서수 3명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고, 『신구당서(新舊唐書)』에는 718년 집현전서원(集賢殿書院)에 탁서수 6명과 그 밖의 작업에 종사하는 서기와 장정공, 제필공 등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현존하는 최고의 탑본 가운데 9세기의 『금강경』 인쇄본 1권이 돈황에서 발견되었다. 구양순(歐陽詢)이 쓴 「화도사비(化度寺碑)」와 당태종이 쓴 「온천명(溫泉銘)」 서첩이 있다. 또 오대(五代)에 이승검(李昇檢)이 궁중에서 소장하고 있던 고대 명가 묵적들을 석판에 새긴 『승원첩(昇元帖)』이라는 각첩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러한 석각 탑본은 송대(宋代)에 이르러 각첩으로 발전하였다. 현존하는 최초의 각첩은 992년(송 순화 3)에 만든 『순화각첩(淳化刻帖)』이다. 특히 송나라 때부터 금석학이 발달하여 탑본에 관심을 갖고 많이 연구하였다. 그래서 서예의 탑본이나 서첩은 송대에 만들어진 것을 최고로 여긴다.
조선에서는 1442년(세종 24)에 전국 각지의 사찰에 있는 비명을 탑본하여 바치게 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며, 성종대에는 「흥법사진공대사비(興法寺眞空大師碑)」를 탑본하여 법첩으로 만들게 하였다고 한다. 또 정조대에는 이순신 장군 신도비명을 직접 짓고 글씨도 써서 그 비의 탑본을 대신들에게 나누어 주었다는 기록이 있다(『정조실록』 19년 5월 11일).
참고문헌
- 錢存訓 저, 김윤자 역, 『중국고대서사』, 동문선, 1993.
- 梁披雲 외, 『중국서법대사전』, 서보출판사, 1985.
- 周俊杰 외, 『서법지식1000제』, 하남미술출판사, 19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