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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2:42 기준 최신판



진풍정(進豐呈)보다는 초대 손님 규모가 작고 진찬(進饌)보다는 성대한 궁중 연향.

개설

조선시대 전기에는 단순히 ‘웃어른에게 올린 잔칫상’ 또는 ‘잔칫상을 올리다’라는 의미로 쓰였으나, 1657년(효종 8)부터는 진풍정보다 규모가 작은 예연(禮宴)을 뜻하는 용어로 확립되었다. 예연은 격식과 규모를 갖춘 연향을 가리킨다. 성리학이 사회 전반에 뿌리내리면서 검약이 강조됨에 따라 17세기 후반과 18세기에는 진풍정보다 간소한 진연(進宴)이 주로 행해졌고, 진풍정은 1686년(숙종 12)의 대왕대비 환갑 경축연을 끝으로 행해지지 않았다. 한편 18세기 후반인 영조대 말기에는 ‘조촐한 잔칫상’이라는 의미로 진찬이라는 말을 썼는데, 1795년(정조 19)에 이르러 진연보다 작은 규모의 예연을 뜻하는 용어로 확립되었다. 이후로는 진연보다 진찬이 주로 행해졌다.

내용 및 변천

오늘날 남아있는 연향 관련 의궤의 표제에는 대개 진풍정·진연·진찬·진작 등의 용어가 포함되어 있는데, 이 용어들이 같은 시기에 공존한 것이 아닐 뿐 아니라 개념 또한 항상 일정한 것은 아니었다.

조선 건국 초에는 ‘잔칫상을 올리다’라는 뜻으로 ‘진풍정’ 또는 ‘헌풍정(獻豊呈)’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이때 ‘풍정’은 ‘격식에 구애됨이 없이 조촐하게 올린 잔칫상’을 가리킨다. 그런데 성종대 이후에는 ‘잔칫상을 올리다’ 혹은 ‘웃어른에게 올린 잔칫상’이라는 뜻으로 ‘진연’이란 용어가 쓰이기 시작했다. 그에 따라 진풍정은 점차 성대한 연향을 의미하게 되었다.

“진연이란 칭호는 정유년(1657)에 시작된 듯한데, 당시 대비전께서 흉년이 들었기 때문에 풍정(豊呈)을 받지 않겠다고 하시어, 풍정에 비해 간략하게 줄이고 진연이라고 이름했으니, 대체로 풍정과 구별하려는 것이었습니다.”라는 1747년(영조 23)의 기사를 통해 확인할 수 있듯이, 진연이 진풍정보다 작은 규모의 예연을 나타내는 용어로 확립된 것은 1657년부터이다(『영조실록』 23년 1월 22일).

조선시대 후기의 진연은 진풍정보다 규모가 작다고 해도 전기의 그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조선전기의 진연은 1년에 여러 차례 베풀 정도의 조촐한 잔칫상을 의미했지만, 조선후기에는 수년에 한 번 특별한 경사가 있는 경우에만 베풀 만큼 격식과 규모를 갖춘 예연을 뜻하였다.

성리학이 뿌리내린 조선시대 후기에는 검약의 덕목이 더욱 강조되었으므로, 왕실에서는 규모가 크고 의식이 정중한 진풍정보다는 진연을 선호하였다. 숙종대에 설행된 궁중 연향을 예로 들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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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6년 인조의 계비(繼妃) 장렬왕후(莊烈王后)의 환갑 경축연을 끝으로 ‘진풍정’이라는 명칭의 예연을 베풀지 않게 됨에 따라 이 용어는 사라지게 되었다. 그 뒤 17세기 후반과 18세기에는 주로 진연이 행해졌다.

한편 영조대에는 ‘조촐한 잔칫상’이라는 의미로 진찬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는데, 1795년에 이르러 진연보다 작은 규모의 예연을 뜻하게 되었다. 또한 1827년에는 진찬보다 작은 규모의 예연을 가리키는 진작(進爵)이라는 용어가 등장하였다(『순조실록』 27년 7월 25일).

17세기 후반 이후에는 진풍정이 사라지고, 1795년에는 진연보다 작은 규모의 예연인 ‘진찬’이 등장했다. 또 1827년에는 진찬보다 규모가 작고 간소한 ‘진작’이 생겨났다. 그 결과 조선시대 후기에는 진연이 상대적으로 의식 절차가 복잡하고 규모가 성대한 예연을 뜻하게 되었다. 그런 까닭에 18세기 말 이후에 대비 및 왕과 왕비는 자주 ‘진연’을 사양하였고, 그에 따라 진찬이 주로 행해졌다. 오늘날 남아있는 19세기 연향 관련 의궤 10종 중 7종이 『진찬의궤(進饌儀軌)』이고 나머지 3종이 『진작의궤(進爵儀軌)』인 것이 이를 잘 보여준다.

참고문헌

  • 김종수, 「규장각 소장 연향 관련 儀軌 고찰」, 『규장각소장 분류별의궤 해설집』, 서울대학교 규장각,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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