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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2:41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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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호시 |
한글표제 | 호시 |
한자표제 | 互市 |
관련어 | 개시(開市), 단개시(單開市), 마시무역(馬市貿易), 쌍개시(雙開市), 호시규정(互市規定) |
분야 | 정치/외교 |
유형 | 개념용어 |
집필자 | 이철성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호시(互市) |
다른 국가 혹은 부족과의 교역.
개설
호시(互市)도 개시와 마찬가지로 행위성과 공간성을 동시에 지니는 용어이다. 즉, 상호를 위한 시장이란 뜻과 시장에서의 교역이란 의미가 중첩된다. 하지만 역사적으로는 조선후기 사행무역의 범주에 드는 북경·심양·책문에서의 무역을 지칭하기 보다는, 북방 여진 상인과의 회령과 경원교역, 봉황성 지역 관원과 주민을 위한 중강교역 그리고 제한적이지만 일본 상인과의 남쪽 해안 포구에서의 교역을 의미하였다. 그중에서도 호시라고 할 때는 주로 두만강 유역에서의 거래를 의미하는 경우가 많았다.
내용 및 변천
조선과 만주 지역 여진인 사이에는 조선전기부터 교역이 이루어졌다. 이는 여진인이 식량·소금·철 등을 공급받기 위하여 그들의 특산물을 조선에 진상(進上)하고, 이를 조선이 받아들이는 단순한 물자 교역의 형태였다. 그러나 여진인은 그것만으로는 부족하여 변경 지역에 호시를 개설할 것을 요청하였다. 조선은 1406년(태종 6)에 함경북도 경원과 경성(鏡城)에 정식으로 무역소를 건립하여 여진인에게 물자교역 창구를 마련해 주었다. 대신 조선은 변방에서의 소란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었다.
명말 누르하치가 여진 사회를 통합할 무렵 만주 지역에는 이미 농경 생활이 보급되었지만, 농기구 및 농우 등 생산수단의 자급은 불가능한 상태였고 농업 노동력도 부족하였다. 여진족은 이를 주로 명과의 마시무역(馬市貿易)을 통하여 해결하고 있었다. 그런데 후금과 명과의 적대 관계가 표면화되자 명은 경제 봉쇄를 위하여 마시무역을 단절시켰다. 후금으로서는 돌파구를 조선에서 찾았다. 이에 후금은 조선에 국경무역 개설을 적극 요청하게 되었으나, 조선은 경제적 손실과 명과의 외교적 관계로 적극성을 띠지 않았다. 이에 후금은 전쟁을 통하여 호시 설립을 강요하였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후 후금은 포로쇄환에 협조하는 대신 조선에 호시 설립을 강력하게 요구하였고, 조선은 1628년(인조 6) 중강개시를 개설하였다. 후금은 중강개시와 아울러 회령개시도 요구하였다. 조선은 여진인이 옮겨 가 비어 있는 곳에 무역하는 것은 불가하며, 정묘호란으로 재정이 파탄되어 개시를 감당할 능력이 없다는 핑계로 응하지 않았다. 그리고 개시는 어렵지만 북쪽 변경 지역 주민들이 임의로 하는 사시(私市)라면 금지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내비치기도 하였다. 이것이 청 태종에 의한 병자호란 발발의 한 배경이 되었다.
병자호란 후 청과 군신 관계를 맺게 된 조선은 마침내 개시무역에 동의하여 1637년(인조 15) 영고탑(寧古塔) 여진인은 회령에서, 고이객인(庫爾喀人)은 경원에서 교역하기로 약정하고 호시규정(互市規定)을 마련하였다. 회령개시는 1년에 1번, 경원개시는 2년에 1번 개설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다. 회령개시만 열리는 해는 단개시(單開市), 경원개시가 함께 열리는 해를 쌍개시(雙開市)라 하였다.
청은 1644년(인조 22) 중원을 장악하여 발전할 수 있었지만, 그들의 발상지인 만주 지역의 경제에는 직접적인 혜택이 미치지 못하였다. 청은 만주 지역을 조상이 발생한 지역, 즉 조종(祖宗)의 용흥지지(龍興之地)로서 신성시하는 한편 지역 특산물인 인삼·수달피 가죽·동주(東珠) 등의 이익을 독점하기 위하여 봉금정책을 실시하여 만주팔기를 주둔시키고 한인(漢人)의 유입을 억제하였다.
17세기 후반 강희 연간에는 러시아의 동진(東進)에 대비하기 위하여 길림성과 흑룡강 일대에 방어력을 강화하고 팔기군병의 식량 공급을 위한 관장(官莊)과 둔전(屯田) 개간을 추진하였다. 그 결과 오라(烏喇) 지역 50곳의 관장에 6,000상(晌)의 토지와 영고탑 지역 13곳의 관장에 1,560상의 토지를 개척하였다. 만주 지역 팔기군병의 경제적 기초를 기지(旗地)와 관장에 두는 이러한 정책으로, 이 지역의 농업경제는 계속 발전하였다. 이에 따라 북관개시(회령·경원)도 변화하였다.
회령개시는 처음에는 영고탑인만 참가할 수 있었으나 1642년(인조 20)에는 야춘인(也春人), 숙종대에는 길림 오나인(烏喇人), 타생(打牲) 오나인도 개시에 참여하였다. 경원개시는 고이객여진인을 위하여 개설한 것이지만 초기에는 암구뢰달호(巖丘賴達湖) 지역의 여진인이 참여하다가 1654년(효종 5)에 고이객여진인이 본격적으로 참여하였다. 이후 회령개시에 참가하였던 야춘인도 경원개시에 모두 나오고 있는데, 이들은 모두 훈춘강(暉春江) 지역의 여진인들로서 훈춘 기관(旗官)의 영솔 하에 개시에 참가하고 있어 모두 훈춘인이라고 불렀다. 이처럼 만주 지역의 경제발전에 따라 회령·경원의 호시(互市)는 점차 이 지역 발전의 거점이 되고 있었다. 만주 지역은 여전히 중원의 중앙정부로부터 직접적이고 항상적인 물자지원이 이루어지지 않아, 기초적인 생활물자 및 농기구, 농우의 보급은 조선과의 호시를 통하여 해결해야 했기 때문이다.
북관개시는 참가 인원과 교역 물종, 교역 절차 등이 규정되어 있었다. 교역의 형태는 공시(公市)·사시(私市)·마시(馬市) 세 종류의 교역이 이루어졌다. 공시는 조선과 청 관원의 감독 하에 정해진 물품을 주고받는 것이었다. 조선에서는 주로 농우·농기구·소금·솥 등을 제공하였다. 조선에서 공급한 공시 물품에 대하여 청은 회례가(回禮價)라는 명목으로 양가죽 옷, 사슴가죽, 소청포(小靑布)를 지급하였는데 그 가격이 형편없어 조선에서는 거저 주는 것과 같았다. 따라서 북관개시가 무역사적으로 의미를 지니는 교역은 사시와 마시였다.
사시는 공시가 끝난 뒤 양국의 사상(私商)들에게 허용된 교역이었다. 청은 원칙적으로 사시를 인정하지 않았으나, 양국의 관원은 금지 품목을 제외하고는 교역 물종이나 수량에 간섭하지 않았다. 그런데 18세기 건륭 연간 한인들이 만주 지역에 유입되어 거주함에 따라 북관개시의 중요성이 더 커졌다. 이에 청의 사상들이 북관개시에 참여하고, 조선인들도 적극 호응하였다.
사시교역은 물물교환의 형태로 이루어졌다. 청에서는 주로 가죽 제품과 포목 및 전도(剪刀)·모자(帽子) 등이었고, 조선에서는 소·말·종이·소금·동·철·솥·다시마 등이었다. 공시는 조선 측의 손실을 전제로 한 것이었으나 사시는 양국 상인의 경제적 욕구에 부응하여 이루어진 것으로 조선 측의 이익이 많았다.
사시가 끝나면 마시가 개설되었다. 마시는 조선의 우마와 청마를 교역하던 가축시장으로 청인들이 귀환하기 전 1~2일 동안 열렸다. 마시 역시 사상들의 교역이었다. 청에서는 사무역을 원칙적으로 금지하였기 때문에 북경 통관 중에는 병을 핑계로 마시에 참여하지 않아 책임을 면하려는 자들도 있었다. 마시에서 조선은 어승마(御乘馬)와 전마(戰馬)로 사용할 청마를 구입하였으며, 청은 조선의 농우와 북마(北馬)를 구입하였다. 따라서 마시의 주된 고객은 어승마의 봉진을 책임지고 있는 관아와 함경도 각 읍의 무사들이었다. 반면 청에서는 만주 지역의 농경화에 따라 농우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였다. 북마는 과하마(果下馬)로 잘 달리지는 못하나 짐을 무겁게 짊어지고 멀리갈 수 있으며 값이 쌌다.
마시 초기에는 청마와 북마 혹은 조선 농우의 교환비율이 조선에 지나치게 불리하여 문제가 되었다. 그러나 18세기 전반 만주에서 말의 번식이 극성해지면서 더 이상 북마 유출 문제는 거론되지 않았다. 이후 마시교역은 청국의 말과 조선의 소가 교환되는 우마교역(牛馬交易)의 형태로 이루어졌다.
북관개시가 열릴 때마다 함경도에서는 공시 물종 외에 청 관원 및 상인의 숙식비용, 가축의 사료 값, 증급(贈給) 예단가 등을 마련해야 했다. 그러나 1660년(현종 1)에 만들어진 「교역인마정식(交易人馬定式)」에는 통관 일행의 수가 확정되지 않았고, 실제 개시 참여 인원도 지켜지지 않았다. 「교역인마정식」에서는 회령개시의 참가 인원은 350명을 넘지 못하고, 말·소·낙타는 640필로 결정하였다. 하지만 1694년(숙종 24)경에는 개시 참가인수가 400~500명을 넘었으며, 말도 이와 마찬가지로 증가하였다. 청인들은 개시읍에서 규정 외의 예단을 징색하고 있었다. 이러한 폐해는 개시 정식이 없었던 경원개시의 경우는 더욱 심하였다. 이에 함경감사김연(金演)은 경원개시를 중강개시와 마찬가지로 경원부 바깥에서 치르도록 청에 요청하자고 하였다.
한편 쌍시년에 회령개시를 마친 후 경원개시를 감독하기 위하여 가는 통관일행이 유숙하는 종성과 온성도 접대 부담을 크게 지고 있었다. 1755년(영조 31) 함경도별견시관(別遣試官)조영국(趙榮國)은 경원개시 때 통관 일행이 거의 100여 명에 이르러 고을에서 받치는 세포(細布)만도 100동(同)이나 되어 감당할 수 없으며, 이들이 종성과 온성에서도 오래 머물면서 침학하니 경원개시를 철폐하자고도 하였다. 영조 연간에 개시 폐단을 시정해야 한다는 요청이 빈번히 제기되자 영조는 북관개시의 폐단을 이정할 방안을 모색하였다. 그 결과가 1769년(영조 45)에 「함경도회원개시정례(咸鏡道會源開市定例)」이다.
「개시정례(開市定例)」는 청 측에게 개시에 참가하는 사람과 말의 수를 준수할 것을 요구하고 청관원에 대한 접대 비용의 부담을 줄이며 증급예단을 규정하여 개시로 인한 함경도민의 부담을 최대한 줄이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하고 있다. 「개시정례」가 만들어진 이후에도 폐단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으나, 이후 개시에 의한 폐단은 상당히 줄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개시정례」에도 통관 일행에 대한 인원과 급료를 규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문제가 되었다. 통관은 「개시정례」에 75명이었는데, 1783년(정조 12)에는 163명이나 되었고 말의 수도 통관을 따르는 사람 1명이 3~10마리까지 끌고 오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은 19세기에도 지속되다가 1849년(철종 즉위년)에는 221명에 달하였다. 이에 1851년(철종 2) 「개시정례」를 보충하고 개정하여 중간본(重刊本)을 간행하면서 통관 일행의 수를 통관 이하 통관을 따르는 사람들을 합쳐 64명, 말은 168필로 확정하여 수록하였다. 또한 경원개시에 통관을 수행하는 박씨(博氏) 일행의 수도 확정하여 사람은 12명, 말은 60필로 정하였다. 이후 「중간개시정례(重刊開市定例)」는 1882년(고종 19) 개시가 철폐될 때까지 계속 북관개시의 정식으로 시행되었다.
한편 호시(互市)라고 할 때는 압록강 유역의 중강개시를 의미할 때도 있었다. 중강개시는 압록강가 중강에서 열렸는데, 1593년(선조 26) 전국적인 기근과 임진왜란 중 군량미 확충을 위하여 조선의 요청으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후금이 흥기하고 명이 쇠퇴하면서 중강개시는 유명무실해졌다. 중강개시는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중에 조선인 포로 속환과 연계되어 열리기도 하였지만,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 것은 청이 중원을 차지한 이후였다. 청이 만주 지방의 관원과 변방 지방민의 생활필수품 조달을 위하여 개시를 요구한 것이다.
이에 1647년(인조 25)부터 매년 2월 15일과 8월 15일에 두 차례 교역을 시작하였다. 조선의 수출품은 농우(農牛)·농기구·소금·해산물·종이 등이었는데, 청은 그 대가를 품질이 추악한 소청포로 계산해 주었다. 따라서 조선은 중강개시에 소극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중강개시를 기회로 규정 외의 교역을 통하여 이익을 보려는 사상층이 늘어났고, 17세기 후반부터는 중강후시가 활발히 일어났다. 그러나 중강후시는 1700년(숙종 26) 정부의 강력한 의지로 중단되었다. 이후 중강후시에 몰리던 상인은 봉황성 책문으로 가서 대규모로 교역하기 시작하였다. 이후로 중강개시는 공무역적 성격만 남게 되었다.
중강개시와 북관개시 이외에 호시라고 쓰는 경우는 조선전기 왜관(倭館)이 설치된 포구에서의 교역과 임진왜란 이후 부산 왜관에서의 교역에도 서술적 의미로 사용되었다.
의의
조선후기 호시는 대부분 북관개시와 중강개시 그중에서도 북관의 회령과 경원개시를 일컬었다. 북관개시는 개설 당시 청의 강압적 요구와 공시로 인한 손실, 개시 운영에 따른 경제적 부담 등의 이유로 부정적으로 인식되어 왔다. 그러나 18세기 이후 지역 주민들은 북관개시를 경제활동의 영역으로 여겨 사교역을 확대하는 등 보다 적극적으로 이용하였다. 그 결과 북관개시가 국내 상업 부문과 연계되어 지역 주민의 경제활동이 활성화되었다.
참고문헌
- 김종원, 『근세 동아시아 관계사 연구-조청교섭과 동아시아삼국교역을 중심으로』, 혜안, 1999.
- 고승희, 『조선후기 함경도 상업연구』, 국학자료원, 2003.
- 주상길, 「朝鮮後期 朝·淸 邊市貿易 硏究」,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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