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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2:41 기준 최신판



역사적인 사실이나 인물을 제재로 하는 시.

개설

영사시(詠史詩)는 영사(詠史)·사시(史詩)·역사시라고도 한다. 역사적 사건이나 인물 자체를 계기로 삼아 작가 자신의 문제의식을 빗대어 표현하거나 당대의 현실을 풍자 또는 경계하려는 의도에서 지어진 것이다.

내용 및 특징

영사시는 중국 한나라 시대 반고(班固)의 「영사(詠史)」에 와서 성립되었고 소통(蕭統)이 편찬한 『문선(文選)』에 이르러 시의 한 유형으로 인식되었다.

영사시는 역사를 읊는다는 보편적인 개념 위에 하위 개념의 형식을 여러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역사 사실의 전승에만 충실한 사전형(史傳型), 작가의 정회에 치중한 영회형(詠懷型), 작가의 역사 비평이 중심인 사론형(史論型), 비평과 영회가 중심인 의론형(議論型), 역사 회고에 중점을 둔 회고형(懷古型)과 역사를 노래의 관점에서 읊은 악부시형(樂府詩型)으로 나눌 수 있다. 또한 이들 형식이 혼합적으로 나타난 경우도 적지 않다. 비록 작품의 제목에 ‘영사’와 관련된 언급이 없더라도, 작품의 내용으로 보아 역사를 읊은 것이라면 영사시의 범주에 넣을 수 있다.

영사시는 역사를 시적으로 형상하기 때문에 일반 서정시에 비해 개인의 순수한 서정이 약화될 수밖에 없는 한계를 지닌다. 반면, 역사를 소재로 하여 작자의 뜻을 읊는 것이기 때문에 작가 의식이 다른 작품에 비해 더 강하게 드러난다.

중종은 「영사」라는 시를 신하들에게 내리며 시를 짓도록 명하였고(『중종실록』 23년 4월 25일), 현종대에는 이단하(李端夏)가 중국 초나라의 역사를 제재로 한 정문부(鄭文孚)의 영사시를 소개하면서 그의 죽음이 억울함을 밝혀 그를 추증하도록 상소를 올렸다(『현종실록』 7년 5월 23일).

변천

동한시대부터 위진시대까지는 역사 서술에 주안점을 두었는데, 진나라 때 좌사(左思)와 도잠(陶潛) 등에 이르러서는 영사와 서정이 결합하였다. 그 뒤 당나라 때는 이러한 경향을 계승하면서 역사에 대한 반성과 자아의 체험을 그대로 기록하거나, 나아가 현실에 대한 의식을 역사에 반영하는 작품이 창작되었다. 송나라 때는 영사를 통해 현실 정치 및 사회 문제를 비판하려는 태도가 강화되어, 의론(議論)을 위주로 하는 방식이 선호되었다. 후대에는 풍속과 지리까지 제재로 삼아 죽지사(竹枝詞)의 모습까지 갖추게 되었다. 영사시는 우리나라에서도 이와 유사하게 발전하였다.

참고문헌

  • 민병수, 『韓國漢文學槪論』, 태학사, 1996.
  • 심경호, 『한국 한시의 이해』, 태학사, 2000.
  • 김영숙, 「詠史詩의 槪念과 작품의 實相」, 『동방한문학』37권, 동방한문학회, 2008.
  • 김창경, 「唐代 詠史詩의 발전과 전변」, 『동북아문화연구』2집, 동북아시아문화학회, 2002.
  • 이철희, 「영사시와 회고시에 대한 시학적 이해」, 『한국어문학연구』54집, 한국어문학연구학회, 2010.
  • 『漢語大詞典』, 漢語大詞典出版社, 19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