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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2:41 기준 최신판



조선후기 향촌 사회에서 향권을 둘러싸고 일어났던 여러 가지 쟁단.

개설

향전(鄕戰)이란 조선후기에 향촌 사회에서 향권(鄕權)을 둘러싸고 일어난 싸움을 말한다. 좁은 의미에서의 향전은 기존의 향권을 장악하고 있었던 세력에 대하여 새로이 등장한 세력의 도전에 의하여 야기되는 싸움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그러나 넓은 의미에서는 사족과 향족과의 싸움이든 사족간의 싸움이든 향촌 사회에서 일어난 여러 가지 싸움을 향전이라고 할 수 있다.

좁은 의미의 향전은 향촌 사회의 권력 구조 변동으로 기존에 향권을 장악해 왔던 사족과 수령권을 배경으로 새롭게 등장한 향족과의 대립을 말한다. 즉 ①유·향(儒鄕)의 대립, ②유임(儒任)·향임(鄕任)을 둘러싼 대립, ③향안 입록을 둘러싼 대립, ④사족 사이에 제반 향권을 둘러싼 대립으로 유형화 할 수 있겠다. 넓은 의미의 향전은 ①향안 입록과 향청 임원의 선임을 둘러싸고 야기된 경우, ②서원·사우(祠宇)의 배향(配享)·추향(追享) 및 위패(位牌)의 서차(序次) 문제를 둘러싸고 일어나는 경우, ③향권과 관권의 충돌에서 야기되는 경우, ④조상의 학통과 사우연원(師友淵源)의 문제, 문집 간행과 문자상의 시비 등을 두고 야기되는 경우, ⑤전답(田畓)·묘산(墓山)의 소유와 사용권 문제, 제언(堤堰)과 보(洑: 川防)의 축조, 수리, 사용권을 둘러싸고 씨족, 촌락 간에 야기되는 분쟁, ⑥사회 신분과 계층 간의 대립과 갈등, 적서(嫡庶) 문제, 사족과 이족 간의 대립 등에서 야기되는 싸움을 모두 향전이라고 할 수 있다.

향전이 집중적으로 문제된 것은 영·정조대로서, 이 시기는 사족 중심의 향촌 질서가 붕괴되고 새로운 지배 질서가 형성되는 시기이다. 향전은 시기와 지역에 따라 양상이 다르고 향전에 참여하는 사회 세력도 사족, 서얼, 향족, 이족(吏族), 부민(富民) 등 다양하였으나, 향전을 향권을 둘러싼 신구 세력 간의 대립으로 이해할 때, 그 유형은 두 가지로 구분된다. 하나는 기존의 향촌 사회를 지배해 왔던 구지배층은 사족과 새로이 관권의 비호 아래 실질적으로 향권을 장악해 간 향족간의 대립이다. 다른 하나는 향촌 지배 기구의 직임(職任)인 유임(儒任)과 향임을 둘러싼 대립이다. 전자는 흔히 유향(儒鄕)의 대립으로, 후자는 신유(新儒)와 구유(舊儒), 신향(新鄕)과 구향(舊鄕) 간의 대립으로 표현되었다. 그런데 18세기 중엽을 전후하여 과거 사족지배질서의 모체인 향안을 중심으로 한 향회가 관권에 의하여 부정되고 향회의 성격이 수령의 부세(賦稅) 자문기구로 변하면서, 즉 향권이 사족에서 수령 및 이향층(吏鄕層)으로 넘어가면서 그 대립의 주요 양상은 후자의 유형으로 넘어갔다. 즉 19세기 향전의 일반적인 모습은 향임과 유임(儒任), 교임(校任)을 차지하기 위한 싸움이었으며, 그것이 신향과 구향의 대립 또는 신유와 구유의 대립으로 표현되었다.

내용 및 특징

향전은 여러 가지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먼저 현종 원년에 일어난 개성부 화곡서원(花谷書院) 향전의 전개 과정을 살펴보자(『현종실록』 1년 9월 2일) (『현종개수실록』 1년 9월 1일). 서경덕(徐敬德)을 모신 개성 화곡서원(花谷書院) 유생들의 향전은 중앙의 관료들과 수령에까지 연루된 큰 사건이었으며 수십 년에 걸쳐서 전개되었다. 현종 원년에 일어난 화곡서원의 향전은 서원의 위판을 훔쳐서 파괴하는 작변에 불과하였지만, 개성부와 중앙 정부에 서로 소장을 올리고 다투는 과정에서 중앙 정부의 대신에까지 연루되는 큰 옥사로 발전하였다.

서원의 위판 파괴 작변을 둘러싼 개성부 화곡서원의 향전은 김영(金泳)의 당류와 그와 반대편에 선 임부양(林敷陽)의 당류가 대립한 사건이다. 이 사건의 발단은 십여 년 전에 임부양의 아들 임주상(林柱商)이 상중(喪中)에 취처(娶妻)를 했다 하여 김영의 주도로 유적(儒籍)에서 그의 이름을 삭제한 유안삭적사건에서 시작되었다. 그 후 성묘(聖廟: 대성전) 대문에 불이 나는가 하면 그로부터 12년 뒤에는 김영의 집 신주(神主)가 한밤에 깨뜨려 졌는데, 김영은 신주를 깨뜨리고 성묘에 화변이 일어난 것은 모두 임부양이 한 짓으로 생각하고 토적(討賊)을 한다 하여 모여서 관에 문서를 올렸다. 당시 개성부의 유생 중에서 조후빈(曺後彬) 등 수십 명이 이에 따르지 않았는데, 이들도 김영의 당에 의하여 적도(賊徒)로 지목되어 유안에서 삭거되었다. 즉 김영의 당이 조후빈 등을 역적 이괄(李适)의 잔당이라고 모함을 하였는데, 사실을 조사하니 근거가 없어 도리어 반좌율(反坐律)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중앙 정부의 대신이 신구(伸救)하여 죄를 면하게 되었고 형조에서 조정하여 일단 진정된 것처럼 보였다.

이러한 상쟁 끝에 결국 마지막에는 서원 위패가 파괴된 것이다. 김영의 당에서는 임부양의 소행이라고 생각하고 임부양의 당은 김영 등이 자작(自作)하여 그들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려 한다고 생각하였다. 서원 작변이 일어난 날의 입재(入齋) 유생인 양몽석(梁夢錫), 현우규(玄禹圭)는 모두 김영의 당이었다. 이에 개성유수남노성(南老星)은 양몽석 등과 그 날 수직(守直) 원노(院奴) 및 조후빈 등 12인과 혐의가 있는 하의갑(河義甲), 윤충갑(尹忠甲)을 가두고 조사하였다. 그런데 원노의 공초에서 양몽석이 입재한 날 초저녁에 심부름을 핑계로 그를 서원에서 20리나 떨어진 자신의 집에 보냈고, 양몽석이 사우(祠宇)의 열쇠를 노복에게서 받아 가지고 있었다고 하였다. 그가 돌아오는 길에 위판칠독(位版漆櫝)을 시냇가에서 습득하여 유생 등에게 달려가 고함으로써 사건화된 것이다. 개성유수는 이 말을 듣고 양몽석 등은 엄형에 처하고 하의갑, 윤충갑 등은 전가사변율(全家徙邊律)에 처하였다.

그런데 영중추부사인 이경석(李景奭)은 처음부터 김영 등을 구원하였고, 유수남노성이 김영의 당만 처벌한다고 불편해 하였다. 그의 조카 이정영(李正英)이 대사간이 되자 국왕에게 차자(箚子)를 올려 남노성이 치옥(治獄)을 잘하지 못했다고 말하였다. 양몽석의 아우도 격쟁하여 소송을 제기하였다. 형조도 남노성이 치옥에 형평성을 잃었다고 회계(回啓)하였다. 이에 유수남노성은 격분하여 공개적으로 면직을 요청하였다. 이경석은 뇌물을 받았다는 비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국왕인 현종은 대론(臺論)이 있어도 개성부의 옥사가 결말을 짓기 전에 먼저 그 관장을 죄주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는다고 하여 면직을 일단 보류하였다.

이상과 같이 개성부 화곡서원의 향전은 유안에서 이름을 삭거한 것이 계기가 되어 수십여 년에 걸쳐서 서로 작변을 하고 중앙 정부의 고관들과 연결하여 상쟁을 지속하였다. 개성부는 삼남 지방과 같은 지역성이 약하기는 하지만, 여기에서도 향촌 사회 향전의 특성을 모두 살펴볼 수 있다. 유안에의 입록을 둘러싼 문제, 향촌 사회의 기강을 확립하는 문제, 위판을 훔쳐 파괴하거나 대성전에 화변을 일으키는 문제, 서로 고소하여 관장의 권한에 기대거나 중앙 권력과 연결하여 상대방을 제압하려는 행태 등은 다른 향전의 양상과 궤를 같이 한다고 할 수 있다.

변천

향전이 공식적인 연대기에서 집중적으로 문제되었던 것은 영조·정조 연간이었다. 이는 사족 중심의 향촌 지배질서가 붕괴되고 관 주도의 통제책이 강화되던 당시의 정치·사회적 변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 시기 향전이 수령권, 즉 관권과 연계되어 전개되고 있었던 것이 그 점을 말한다. 숙종대 이후 중앙 정계가 경색되고 지방 세력의 중앙 진출이 크게 억제되는 가운데 지방 세력을 배경으로 중앙 정계의 재편을 기도하였던 이인좌(李麟佐) 난의 실패를 계기로 지방 세력은 결정적으로 약화되었다.

이후 지방 통제책은 수령을 중심으로 더욱 강화되었다. 수령 중심의 관 주도 통제책, 즉 왕권에 위협을 줄 수 있는 모든 사건은 철저히 금지되었다. 이러한 정책이 ‘면천 향전’에서 나타난 것이라고 하겠다. 1731년(영조 7) 충청도 면천(沔川)에서 "수령이 향임(鄕任)과 향족(鄕族)을 비호하고 유림(儒林)을 저해한다."는 유생들의 소가 올라오자, 영조가 이것을 향전으로 지목해 소두(疏頭)를 유배시켰다.

이전에도 향촌 사회에서는 여러 형태의 쟁단이 있었지만, 그것이 향전으로 파악되지 않았던 것은 위와 같은 정치·사회적 변화와 관련해 이해해야 할 것이다. 영조는 향전에는 시비가 있을 수 없으며 향전에서 시비를 가리는 것 역시 당심(黨心)으로 여기고 있었다. 그와 같은 현상은 농부가 잡초를 뽑아 없애듯 완전히 제거하여야 할 것으로 생각하였다.

1762년(영조 38) 당색과 관련된 담양 향전을 계기로 ‘각도의 향전을 금할 것을 명[命禁各道鄕戰]’(『영조실록』 38년 7월 21일)하는 향전율(鄕戰律)이 내려졌다. 향촌 사회 지배층 내부의 향전은 조정에서 간섭할 필요가 없는 것이라는 점이 표방되기도 하였고, 이 방면에서 영조의 정책을 계승한 정조 역시 향전 금지를 기회가 있을 때마다 강조하였다.

『수교등록(受敎謄錄)』 권2에 의하면, 1792년(정조 16)에도 경기도 이천에서 향전이 일어나, 향전 죄인 이의형(李義亨)을 유배하면서 내린 판부(判付)에, 향전을 일으킨 자는 곡직을 불문하고 엄형에 처하고 충군(充軍)하도록 하는 조처를 내렸다. 즉 향전에 대한 법금(法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향전에 관련된 일이 국왕에게까지 보고가 되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하면서, 앞으로는 죄의 경중을 논하지 말고 나타나는 대로 전대의 수교법령에 따라서 준행할 것을 지시하였다. 즉 향임이나 향교, 서원을 둘러싸고 서로 소장을 올리는 자는 곡직을 불문하고 3차 엄형한 후에 향안이나 유적에서 영원히 삭제하고 종신토록 절도(絶島)에 충군하도록 지시하였다.

그러나 향전을 금한 이후로도 각지의 향전은 그치지 않았고 그 폐는 날로 심해져갔다. 심지어 ‘향전율(鄕戰律)’이라는 명목 하에 감사와 수령의 천단이 야기되기도 하였다. 이는 수령을 중심으로 한 관 주도 향촌 통제책 자체가 그를 보좌하는 이서(吏胥)와 향임(鄕任)을 매개로 하는 것이었고, 이향(吏鄕)에로의 진출이 수령에 의해 천단될 수밖에 없었던 당시 권력 구조의 취약성에 기인한 것이었다. 따라서 구지배층과 새롭게 향권에 도전하고 있던 세력 간의 향권 장악을 둘러싼 대립이 지속되는 한 향전은 확대, 심화되어 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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