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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2:40 기준 최신판



조선시대에 광주 관요에서 왕실과 궁궐 및 관청에 진상한 자기.

개설

조선초기에 경기도 광주에 관요를 설치하고 사옹원(司饔院) 분원(分院)이 이를 관장하면서 왕실에 상납하는 자기는 공납자기에서 진상자기(進上磁器)로 바뀌었다. 국초부터 진상품은 공납품 심의 대상에서 제외되는 매우 특별하고도 예외적인 공물이었다. 이렇듯 분원 자기는 왕실에 상납하는 별격(別格)의 자기인 진상자기였으므로 지방의 토산품을 조세의 일종인 공물로서 바친 공납자기와는 본질적으로 구별된다.

영조가 즉위 전에 사옹원 도제조를 지낼 때 분원에서 제작하는 왕실용 자기에 ‘진상다병(進上茶甁)’이라는 네 글자를 쓰도록 한 점에서 보듯이 진상자기라는 표현은 문헌 사료나 자기의 명문에 일반적으로 사용되었다.

내용 및 특징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에 의하면, 조선시대 사옹원 분원에서는 봄·가을로 1년에 두 번 춘번(春燔)과 추번(秋燔)으로 나누어 자기를 해마다 정기적으로 진상하였다. 2월부터 제작된 춘번기는 6월에 진상하여 하등진상(夏等進上)이라 하였고, 10월에 진상된 추번기는 추등진상(秋等進上)이라 하였다. 『승정원일기』에 그 양은 13,000여 점이라는 기록이 있다. 1867년(고종 4)에 간행된 『육전조례(六典條例)』에는 13,720개의 사기가 봄, 가을에 진상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진상자기는 진상의 형식과 성격에 따라 예번(例燔)과 별번(別燔)으로 구분된다. 별번이란 궁중에서 가례나 사신 접대 등의 일이 있을 때 특별히 번조한 것을 말하며, 예번은 궁중에 연례적으로 진상하는 자기이다. 별번한 자기는 ‘별사기(別沙器)’ 또는 ‘별번사기(別燔沙器)’라고 하였다. 『분원자기공소절목(分院瓷器貢所節目)』의 기록을 통해, 연례적으로 진상하는 자기와 별번자기는 품질 면에서 우열이 있고 가격 면에서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승정원일기』의 1677년(숙종 3) 기록에 제조인 종친이나 관료가 왕실에서 특별히 갑기(匣器)를 번조하도록 할 때 개인용으로 많은 양의 갑번자기를 장인들에게 제작하도록 했다는 것으로 보아 별번은 갑기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갑기는 갑발에 자기를 넣어 소성하는 방식으로 최고급 자기 생산에 사용되는 방법이다. 예번의 경우에는 상번(常燔)이라 하여 별번과 달리 갑발에 넣지 않고 소성하는 경우도 있었다. 『일성록(日省錄)』의 1795년(정조 19) 기록에 예번은 가마 천장까지 재임할 수 없고 갑번은 가마 천장까지 재임할 수 있다는 것으로 보아 예번은 갑번자기처럼 차례대로 쌓을 수 없었음을 알 수 있다.

변천

1413년(태종 13)에 전라도관찰사에게 명하여 해마다 왕실에 자기를 바치게 하였다는 내용으로 보아 조선초기에는 각 도에서 공납자기를 받아 사용하였고 아직 왕실 전용 그릇을 생산하는 관요 체제는 성립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태종실록』 13년 7월 16일). 이후 관요와 사옹원 분원의 설치로 상납의 성격이 다소 바뀌었다. 관요 설치 이전에는 도자기를 조세의 일종으로 공납하였지만, 관요와 분원을 설치한 이후에는 공납 성격을 띠기보다는 왕실에 관민이 봉상하는 별격의 예물로서의 특징을 보이며, 중앙요와 지방요의 개념이 생겨 엄격히 분리되었다.

1466년(세조 12)의 기록에 의하면, 진상자기는 원래 사용 목적 이외의 용도로 사용하는 것을 엄히 다스리고 사사로이 제조하는 장인들도 처벌하도록 규정하였다(『세조실록』 12년 6월 7일). 이처럼 조선전기의 진상자기는 중앙관청인 사옹원의 엄격한 감독을 받아 제한적으로 생산, 진상하였다. 16세기 이후에는 사옹원 제조인 종친들이 진상자기와 관련한 비리를 저질러 폐해가 일어났다는 기록이 있다(『중종실록』 19년 6월 27일). 이로써 진상자기로 인한 병폐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 관요와 사옹원 분원의 역할은 어용자기를 번조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역할은 기본적으로 분원이 창설되었을 때나 몇 백 년이 지난 후에도 변하지 않아서, 대전(大殿)에서 소용되는 자기들은 대동법이 시행된 이후에도 광주 분원에서 직접 번조하여 사옹원에 납입하는 형식이 유지되었다.

18세기 후반 이후에는 각종 왕실 연례 시에 사용되는 진상자기의 양이 폭증하고 이에 따른 인정 잡비의 증가와 왕실 재정의 궁핍으로 점차 진상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게 되었다. 결국 1884년(고종 21)에 사옹원 분원은 관청 체제에서 벗어나 공식적으로 민영화되었고, 진상자기는 12명의 공역(貢役)이 납품을 담당하는 공인으로 지정되어 제작하게 되었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일성록(日省錄)』
  • 『육전조례(六典條例)』
  • 『분원자기공소절목(分院磁器貢所節目)』
  • 김영원, 『조선시대 도자기』, 서울대학교출판부, 2003.
  • 김영원, 『조선 전기 도자사』, 일조각, 2011.
  • 방병선, 『왕조실록을 통해 본 조선도자사』, 고려대학교출판부,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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