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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념용어|대표표제=석남사|한글표제=석남사|한자표제=石南寺|대역어=|상위어=자복사(資福寺)|하위어=|동의어=|관련어=도의국사(道義國師), 석안산(石眼山), 조계종(曹溪宗), 자복사찰(資福寺刹), 인홍(仁弘), 종립특별선원(宗立特別禪院), 통도사(通度寺)|분야=문화/종교/불교|유형=개념용어|지역=울산광역시 울주군 상북면|시대=통일신라~현대|왕대=|집필자=윤기엽|실록사전URL=http://encysillok.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00014433|실록연계=[http://sillok.history.go.kr/id/kca_10712002_002 『태종실록』 7년 12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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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념용어|대표표제=석남사|한글표제=석남사|한자표제=石南寺|대역어=|상위어=자복사(資福寺)|하위어=|동의어=|관련어=염거국사(廉居國師), 혜거국사(慧炬國師), 조계종(曹溪宗), 자복사찰(資福寺刹), 용주사(龍珠寺)|분야=문화/종교/불교|유형=개념용어|지역=경기도 안성시 금광면|시대=통일신라~현대|왕대=|집필자=윤기엽|실록사전URL=http://encysillok.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00014434|실록연계=[http://sillok.history.go.kr/id/kca_10712002_002 『태종실록』 7년 12월 2일]}}
  
태종대 88개 자복사 가운데 하나로, 울산광역시 울주군 상북면가지산에 있는 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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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대 88개 자복사 가운데 하나로, 경기도 안성시 금광면서운산에 있는 절.
  
 
=='''개설'''==
 
=='''개설'''==
  
석남사(石南寺)는 824년(신라 헌덕왕 16) 신라에 최초로 선법(禪法)을 전한 도의(道義) 국사(國師)가 9세기 초에 창건하였다. 고려시대에 절의 연혁은 전하지 않는다. 조선 태종 때 조계종의 자복사찰(資福寺刹)로 지정된 지방 명찰이었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 현종 언양현감의 시주로 중창하였고, 순조 중수하였다. 6·25전쟁으로 절이 거의 폐허화되어 고찰의 모습은 사라졌다. 1957년 비구니 인홍이 주지로 부임하여 크게 중창하고 이후 비구니 수행도량이 되었다. 비구니 종립특별선원(宗立特別禪院)이 있는 절로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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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신라초에 담화 또는 석선이 창건하였다고 한다. 고려시대에는 혜거 국사, 태원 등이 중창하였다. 조선 태종 때 조계종의 자복사찰(資福寺刹)로 지정되었고, 세조로부터 교지를 받으며 부역을 면제받는 등 조정의 후원을 받은 지방의 명찰(名刹)이었다. 임진왜란 때 소실된 절을 인조 해원이 크게 중창하였고, 영조 화덕이 중수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내용 및 변천'''==
 
=='''내용 및 변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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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창건
 
(1) 창건
  
헌덕왕 때 당()에 건너가 서당지장(西堂智藏)으로부터 인가(印可)를 받은 도의 국사가 821년(신라 헌덕왕 13) 귀국하여 진전사(陳田寺)에서 수행하던 중 석남사를 창건했다고 한다. 가지산(迦智山)을 석안산(石眼山)이라고도 하는데, 절이 석안산의 남쪽에 있다고 하여 석남사(石南寺)로 하였다고 한다. 창건된 이후 고려시대까지 절에 대한 연혁은 전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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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0년(신라 문무왕 20)에 담화 또는 석선이 창건하였다. 876년(신라 문성왕 18) 선종 구산문 중 가지산문(迦智山門)의 제2세 염거(廉居) 국사(國師)가 주석하면서 중수했다고 한다. 고려시대에 들어와 혜거(慧炬) 국사(國師)가 중창하여 수백명의 승려들이 머물렀다고 한다. 고려후기인 1265년(고려 원종 5) 태원이 중창하였다.
  
(2) 조선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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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조선시대
  
1407년(태종 7) 언양(彦陽: 현 울주) 석남사가 조계종의 자복사찰로 지정되었다([http://sillok.history.go.kr/id/kca_10712002_002 『태종실록』 7년 12월 2일]). 당시 조선시대의 불교 종파는 이전 11개(혹은 12개)에서 [[조계종(曹溪宗)]], [[천태종(天台宗)]], [[화엄종(華嚴宗)]], [[자은종(慈恩宗)]], [[중신종(中神宗)]], [[총남종(摠南宗)]], [[시흥종(始興宗)]] 등 7개 종파로 정리되었는데, 언양 석남사는 조계종에 소속된 자복사찰이었다. 자복사찰은 나라의 안녕과 고을의 복을 빌기 위해 지정한 사찰이었으므로, 조선전기에 석남사가 언양을 대표하는 명찰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한동안 폐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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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7년(태종 7) 12월, 안성 석남사가 조계종의 자복사찰로 지정되었다([http://sillok.history.go.kr/id/kca_10712002_002 『태종실록』 7년 12월 2일]). 당시 조선시대의 불교 종파는 이전 11개(혹은 12개)에서 [[조계종(曹溪宗)]], [[천태종(天台宗)]], [[화엄종(華嚴宗)]], [[자은종(慈恩宗)]], [[중신종(中神宗)]], [[총남종(摠南宗)]], [[시흥종(始興宗)]] 등 7개 종파로 정리되었는데, 안성 석남사는 조계종에 소속된 자복사찰이었다. 자복사찰은 나라의 안녕과 왕실의 복을 빌기 위해 지정하거나 건립하는 사찰이었다. 1457년(세조 3)에는 세조가 직접 친필 교지를 내려 석남사 승려들의 부역을 면제해 주었다. 조선조에 들어와 석남사가 국가로부터 상당한 후원을 받은 지방의 명찰(名刹)이었음을 알 수 있다. 1580년(선조 13) 선조로부터 40근의 황금을 섞어 만든 200근의 청동 범종을 하사받았다. 임진왜란 때 절이 모두 소실되었고 하사받은 범종도 사라졌다. 해원(海源)이 1649년(인조 27)부터 10여 년간 중건하여 사세를 크게 확장했고, 1753년(영조 11) 화덕(華德)이 중수했다. 이후 석남사는 별다른 발전을 보지 못하고 현재에 이르고 있다.
  
(3) 조선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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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현대
  
1674년(현종 15) 언양현감(彦陽縣監)강옹(姜甕)의 시주로 탁령(卓靈), 자운(慈雲), 의철(義哲), 태주(泰珠) 등이 중창하였다. 이어 정우(淨佑), 각일(覺日), 석맹(碩孟) 등이 극락전, 청풍당, 청운당, 청화당, 향각 등을 증축하였고, 희철(熙哲)이 명부전을 세웠다. 1803년(순조 3) 침허(枕虛), 수일(守一) 등이 중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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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석남사에는 대웅전을 비롯하여 영산전, 산신각, 요사채 등이 남아 있다.
  
(4) 근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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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일제강점기인 1912년에 우운(友雲)이 중수하였다. 1950년 6·25전쟁으로 절은 폐허화되고 남아 있던 신라 고찰의 모습은 모두 파괴되었다. 1957년 비구니 인홍(仁弘)이 주지로 부임하여 대웅전, 극락전, 그 밖의 부속 시설을 중창하고 종각, 침계루, 심검당 등을 신축하여 사찰의 면모를 일신하였다. 이때부터 비구니의 수행 도량이 되었다. 현재 건물의 동수는 총 30여 동이며, 가장 큰 규모의 비구니 종립특별선원(宗立特別禪院)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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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남사 대웅전(石南寺 大雄殿,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08호)은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에 단층 맞배지붕의 다포식 구조로 조선후기의 목조 건물이다. 대웅전의 숫기와에서 "옹정 4(3)년 을사 3월일 조성(雍正 四(三)年 乙巳 三月日 造成)"이라는 명문이 발견되어, 1725년에 대웅전이 지어졌음을 알 수 있다. 1978년에 영산전 앞에 있었던 것을 현 위치로 옮겼다.
 
 
=='''문화재'''==
 
  
울주 석남사 승탑(蔚州 石南寺 僧塔, 보물 제369호)는 도의 국사의 사리탑으로 높이 3.53m의 팔각원당형(八角圓堂形)으로 되어 있다. 1962년 5월에 해체 보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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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남사 영산전(石南寺 靈山殿, 보물 제823호)은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팔작지붕 다포식 건물로 석가모니불과 16나한을 함께 모시고 있다. 1562년(명종 17)에 처음 건립되었고 임진왜란 때 소실을 면했다. 조선초기에서 중기 사이의 건축 양식을 갖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암막새 기와에서 "1725년(영조 1) 기와를 바꾸었다[飜瓦]"는 명문이 발견되었다.
  
석남사 3층석탑(石南寺 三層石塔, 울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2호)은 도의 국사가 나라를 외적으로부터 지키려는 간절한 마음에서 824년(신라 헌덕왕 16)에 15층의 대탑으로 세웠으나 임진왜란 때 손실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1973년에 개축되었고 2층으로 된 기단 위에 세운 3층석탑으로, 높이는 2.5m이다. 신라말의 일반적인 3층석탑 형식을 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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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남사 마애여래입상(石南寺 磨崖如來立像,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09호)은 높이 7m, 너비 6.5m 정도의 자연 암벽에 양각된 입상으로, 불상의 크기는 높이 4.5m, 너비 2.8m이다. 통일신라시대의 불상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으나 부분적으로 다소 형식화된 모습이어서 조성 연대는 고려초기로 추정하고 있다.
  
석남사 수조(石南寺 水槽, 울산광역시 문화재자료 제4호)는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물통으로 크기는 높이 91㎝, 길이 270㎝이다. 조성 연대는 고려말에서 조선초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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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남사석탑(石南寺石塔, 안성시 향토유적 제19호)은 2기의 석탑으로 고려후기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참고문헌'''==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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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람고(伽藍考)』     
 
*권상로, 『한국사찰전서』, 동국대학교출판부, 1979.       
 
*권상로, 『한국사찰전서』, 동국대학교출판부, 1979.       
 
*문화재연구소 편, 『문화유적총람』, 문화공보부 문화재관리국, 1977.       
 
*문화재연구소 편, 『문화유적총람』, 문화공보부 문화재관리국, 1977.       
  
 
=='''관계망'''==
 
=='''관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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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2:29 판



태종대 88개 자복사 가운데 하나로, 경기도 안성시 금광면서운산에 있는 절.

개설

통일신라초에 담화 또는 석선이 창건하였다고 한다. 고려시대에는 혜거 국사, 태원 등이 중창하였다. 조선 태종 때 조계종의 자복사찰(資福寺刹)로 지정되었고, 세조로부터 교지를 받으며 부역을 면제받는 등 조정의 후원을 받은 지방의 명찰(名刹)이었다. 임진왜란 때 소실된 절을 인조 때 해원이 크게 중창하였고, 영조 때 화덕이 중수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내용 및 변천

(1) 창건

680년(신라 문무왕 20)에 담화 또는 석선이 창건하였다. 876년(신라 문성왕 18) 선종 구산문 중 가지산문(迦智山門)의 제2세 염거(廉居) 국사(國師)가 주석하면서 중수했다고 한다. 고려시대에 들어와 혜거(慧炬) 국사(國師)가 중창하여 수백명의 승려들이 머물렀다고 한다. 고려후기인 1265년(고려 원종 5) 태원이 중창하였다.

(2) 조선시대

1407년(태종 7) 12월, 안성 석남사가 조계종의 자복사찰로 지정되었다(『태종실록』 7년 12월 2일). 당시 조선시대의 불교 종파는 이전 11개(혹은 12개)에서 조계종(曹溪宗), 천태종(天台宗), 화엄종(華嚴宗), 자은종(慈恩宗), 중신종(中神宗), 총남종(摠南宗), 시흥종(始興宗) 등 7개 종파로 정리되었는데, 안성 석남사는 조계종에 소속된 자복사찰이었다. 자복사찰은 나라의 안녕과 왕실의 복을 빌기 위해 지정하거나 건립하는 사찰이었다. 1457년(세조 3)에는 세조가 직접 친필 교지를 내려 석남사 승려들의 부역을 면제해 주었다. 조선조에 들어와 석남사가 국가로부터 상당한 후원을 받은 지방의 명찰(名刹)이었음을 알 수 있다. 1580년(선조 13) 선조로부터 40근의 황금을 섞어 만든 200근의 청동 범종을 하사받았다. 임진왜란 때 절이 모두 소실되었고 하사받은 범종도 사라졌다. 해원(海源)이 1649년(인조 27)부터 10여 년간 중건하여 사세를 크게 확장했고, 1753년(영조 11) 화덕(華德)이 중수했다. 이후 석남사는 별다른 발전을 보지 못하고 현재에 이르고 있다.

(3) 현대

현재 석남사에는 대웅전을 비롯하여 영산전, 산신각, 요사채 등이 남아 있다.

문화재

석남사 대웅전(石南寺 大雄殿,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08호)은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에 단층 맞배지붕의 다포식 구조로 조선후기의 목조 건물이다. 대웅전의 숫기와에서 "옹정 4(3)년 을사 3월일 조성(雍正 四(三)年 乙巳 三月日 造成)"이라는 명문이 발견되어, 1725년에 대웅전이 지어졌음을 알 수 있다. 1978년에 영산전 앞에 있었던 것을 현 위치로 옮겼다.

석남사 영산전(石南寺 靈山殿, 보물 제823호)은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팔작지붕 다포식 건물로 석가모니불과 16나한을 함께 모시고 있다. 1562년(명종 17)에 처음 건립되었고 임진왜란 때 소실을 면했다. 조선초기에서 중기 사이의 건축 양식을 갖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암막새 기와에서 "1725년(영조 1) 기와를 바꾸었다[飜瓦]"는 명문이 발견되었다.

석남사 마애여래입상(石南寺 磨崖如來立像,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09호)은 높이 7m, 너비 6.5m 정도의 자연 암벽에 양각된 입상으로, 불상의 크기는 높이 4.5m, 너비 2.8m이다. 통일신라시대의 불상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으나 부분적으로 다소 형식화된 모습이어서 조성 연대는 고려초기로 추정하고 있다.

석남사석탑(石南寺石塔, 안성시 향토유적 제19호)은 2기의 석탑으로 고려후기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참고문헌

  • 『가람고(伽藍考)』
  • 권상로, 『한국사찰전서』, 동국대학교출판부, 1979.
  • 문화재연구소 편, 『문화유적총람』, 문화공보부 문화재관리국, 1977.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