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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이나 소지품을 넣기 위하여 헝겊으로 만들어 입구를 졸라매도록 만든 주머니.
 
돈이나 소지품을 넣기 위하여 헝겊으로 만들어 입구를 졸라매도록 만든 주머니.

2017년 12월 9일 (토) 20:45 기준 최신판



돈이나 소지품을 넣기 위하여 헝겊으로 만들어 입구를 졸라매도록 만든 주머니.

내용

1446년(세종 28)에는 유품조사(流品朝士)와 유음자제(有蔭子弟)만 낭자(囊子)의 사용을 허용하였다(『세종실록』 28년 5월 25일). 1458년(세조 4)에는 왕이 신하 및 병사에게 내리는 선물로 낭자가 쓰였으며(『세조실록』 4년 12월 27일), 1470년(성종 1)에는 필단으로 만든 낭자는 뇌물로도 사용되었다(『성종실록』 1년 7월 6일). 1475년(성종 6)에는 이속(吏屬)과 서인(庶人)·복례(僕隷)의 낭자에 사라능단(紗羅綾緞)의 사용을 금하였다(『성종실록』 6년 7월 17일). 이것으로 보아 비단으로 만든 낭자는 고가품인 동시에 사치품이었음을 알 수 있다.

용례

議政府將服色詳定條件以啓 (중략) 〔第〕二條 流品朝士及有蔭子弟外毋得用紗羅綾段綵絹囊子護(滕)(『세종실록』 28년 5월 2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