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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제정책|대표표제=의염|한글표제=의염|한자표제=義鹽|대역어=|상위어=진휼(賑恤)|하위어=|동의어=의창염(義倉鹽)|관련어=반염(頒鹽), 과염(課鹽), 의창(義倉)|분야=경제/재정/공물·진상|유형=법제·정책|지역=대한민국|시대=조선전기|왕대=① ? ② 세종|집필자=이욱|시행시기=|시행기관=|실록사전URL=http://encysillok.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00010880|실록연계=[http://sillok.history.go.kr/id/kca_11409008_003 『태종실록』 14년 9월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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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에서 조선전기까지, 국가에서 염세로 걷은 소금 중 일부를 시가보다 싼 값으로 곡식과 바꾸어 주던 제도, 또는 그 소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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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5년(세종 27)부터 1446년(세종 28)까지 국가에서 소금의 생산과 판매를 직접 담당하고, 거기에서 얻은 수입을 의창의 재원으로 활용하던 제도.
  
 
=='''개설'''==
 
=='''개설'''==
  
조선전기 각 도에서는 납부받은 염세(鹽稅) 중 일부를 상납하고, 그 나머지는 각 도에 비축하여 경비로 사용하였다. 그리고 중앙정부와 각 도에서는 경비로 쓰고 남은 소금이 있으면 평민을 대상으로 해서 시가보다 싼 값으로 미곡과 교환할 수 있게 하였다. 그렇게 얻은 미곡은 [[군자곡(軍資穀)]]으로 활용하였다. 이러한 제도를 가리켜 과염법이라고 하였고, 시가보다 싸게 곡식과 교환하는 소금을 의염이라고 하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ca_11409008_003 『태종실록』 14년 9월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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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5년 흉년을 맞아 의창 운영에 필요한 곡식을 충당하려는 목적으로 의염제를 시행하였다. 같은 해 8월 임시 기구인 의염색(義鹽色)을 설치하였고 소금 제조와 판매를 담당하게 하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da_12708016_001 『세종실록』 27년 8월 16일]). 그때까지 염세만 수납하던 것과는 달리 별도의 관서를 설치하여, 관에서 직접 소금을 생산하고 판매하려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러한 염법을 가리켜 ‘관장번염지법(官掌燔鹽之法)’이라고 하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da_12708027_001 『세종실록』 27년 8월 27일]). 그리고 관에서 소금을 판매한 수익으로 의창의 재원을 보충한다고 하여, 그 소금을 ‘의창염(義倉鹽)’이라고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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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정 경위 및 목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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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5년 충청도·전라도·경상도의 극심한 흉년 때문에 많은 양의 곡식이 진휼에 사용되어 국가의 비축곡이 급격히 줄어들었다. 이 때문에 관에서 직접 소금을 생산하여 그로부터 얻는 수익으로 진휼에 필요한 재원을 확보하려 하였다. 이에 호조(戶曹)에서는 국가에서 소금 생산 현황을 파악하여 적절한 양을 세금으로 거두어들이고, 이를 포(布)와 곡식으로 교환하여 국가 재정과 의창곡으로 활용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의정부의 반대로 이 논의는 중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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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1445년 또다시 흉년이 들자 다시 소금 생산에서 얻는 수익으로 진휼에 필요한 재원을 확보하는 방안을 강구하게 하였다. 세종의 적극적인 의지 하에 당시 세자였던 문종과 새로운 염법 시행에 적극적이었던 공조참판권맹손(權孟孫), 승지유의손(柳義孫)·황수신(黃守身) 등이 함께 염법을 실시하기 위한 구체적인 조치를 의논하였다. 또 권맹손의 건의에 따라 의염색이라는 기구를 설치하여 새로운 염법의 시행을 주관하도록 결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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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염색은 좌의정신개(申槩)와 우의정하연(河演)을 도제조로 하고, 좌참찬이숙치(李叔畤)와 호조판서정분(鄭苯), 공조참판권맹손 등 3명의 제조와 봉상시윤(奉常寺尹)이인손(李仁孫)을 비롯한 8명의 별감으로 구성되었다. 이와 같이 1445년 8월 의염색을 설치함으로써 새로운 염법인 의염제의 시행이 확정되었다.
  
 
=='''내용 및 특징] [변천'''==
 
=='''내용 및 특징] [변천'''==
  
고려시대에 [[의염창(義鹽倉)]]을 설치하고 매년 봄가을에 환과고독(鰥寡孤獨)에게 우선적으로 [[추포(麤布)]] 1필을 납부하게 하고 소금 20두를 받아가게 하였는데, 이를 반염(頒鹽)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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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염법의 핵심은 그때까지 염세만 수납하던 것과는 달리 별도의 관서를 설치하여, 관에서 직접 소금을 생산하고 판매하는 것이었다. 제도를 시행한 당초에는 모든 소금 생산수단을 국가가 소유하고, 소금을 만드는 염간(鹽干)과 각사(各司)의 노자(奴子) 중에서 몇 명을 차출하여 소금을 생산할 계획이었다. 그리고 생산한 소금을 관에서 판매하여 그 수익의 1/3은 생산자에게 지급하고 나머지 2/3는 의창곡으로 활용하고자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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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관에서 소금 생산과 판매를 독점하는 것에 부정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던 관료들이 반대하였다. 이로 인하여 기존의 소금 생산 시설과는 별도로 각 도에 염분을 1군데씩 설치하고 관에서 선군(船軍)을 시켜 소금을 생산하게 한 다음 그것을 판매하게 하였다. 이를 통하여 총 3,492석의 소금을 생산하였고, 이를 판매하여 포 737필과 잡곡 311석을 얻었고 소금 1,293석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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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성과에 자극을 받아 1445년 가을부터 전국에 걸쳐 더 많은 염분을 설치하여 관에서도 소금 생산과 판매에 종사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기존의 염법에 따라 운영되는 염분에 대해서는 의염색의 관원과 각 도 감사가 철저히 조사하여 염세 수입을 늘리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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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듬해인 1446년 의염제를 실시할 때 각 도에 파견된 경차관들은 기존의 염분은 침해하지 않고, 관에서 소유한 염분에서 선군을 사역하여 소금을 생산하도록 하는 규정을 지키지 않았다. 그들은 기존의 염간이 소유하던 염분을 빼앗아 소금 생산을 하게 하는 한편, 민간에서 소금을 판매하지 못하도록 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폐해와 함께 의염제 실시가 결정된 시점에 뜻하지 않게 민간에 소금이 귀해지는 현상이 생겼다. 그 원인은 장마가 들어 소금 생산이 원활하지 못했던 것도 있고, 의염제 실시로 인하여 사역에 동원되길 꺼려한 염간들이 소금 생산에 나서지 않았던 사정도 작용하였다. 또 의염제 실시로 인한 폐단 때문이기도 하였다.
  
조선왕조에 들어서도 이러한 조치가 계속되었으나, 그 내용에 약간의 변화가 있었다. 의염창을 혁파하고 사재감에서 이 일을 관장하였으며, 환과고독뿐만 아니라 관료와 평민 모두에게 포(布)·[[저화(楮貨)]]·동전(銅錢)을 납부하여 소금을 15두까지 교환할 수 있게 하였다. 15두 이상의 소금 교환은 오직 환과고독에게만 허용하였다. 그 후 [[군자감(軍資監)]]에서 이 일을 관장하여 쌀 1두를 납부하면 소금 5두를 교환해 주었다. 이는 당시 시가보다 싸게 소금을 교환해 주는 것이었고, 이를 의염이라고 하였다. 1446년부터는 시가에 비하여 소금 1두를 더해 주는 것으로 바뀌었다. 즉, 당시 소금 시가가 쌀 1두에 소금 2두였으므로, 쌀 1두를 납부하면 소금 3두와 교환해 주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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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의염제를 전국적으로 실시한 초기부터 여러 가지 폐단이 생기고 또 민간에 소금이 귀해져 소금 값이 오르는 문제가 생기자, 의염제 실시를 중지하자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이에 1446년 5월경에 의염색을 혁파하였고 이로써 새로운 염법을 시행하여 의창곡으로 활용하려던 계획은 취소되고 말았다([http://sillok.history.go.kr/id/kda_12805004_003 『세종실록』 28년 5월 4일]).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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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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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9일 (토) 23:31 판



1445년(세종 27)부터 1446년(세종 28)까지 국가에서 소금의 생산과 판매를 직접 담당하고, 거기에서 얻은 수입을 의창의 재원으로 활용하던 제도.

개설

1445년 흉년을 맞아 의창 운영에 필요한 곡식을 충당하려는 목적으로 의염제를 시행하였다. 같은 해 8월 임시 기구인 의염색(義鹽色)을 설치하였고 소금 제조와 판매를 담당하게 하였다(『세종실록』 27년 8월 16일). 그때까지 염세만 수납하던 것과는 달리 별도의 관서를 설치하여, 관에서 직접 소금을 생산하고 판매하려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러한 염법을 가리켜 ‘관장번염지법(官掌燔鹽之法)’이라고 하였다(『세종실록』 27년 8월 27일). 그리고 관에서 소금을 판매한 수익으로 의창의 재원을 보충한다고 하여, 그 소금을 ‘의창염(義倉鹽)’이라고도 하였다.

제정 경위 및 목적

1435년 충청도·전라도·경상도의 극심한 흉년 때문에 많은 양의 곡식이 진휼에 사용되어 국가의 비축곡이 급격히 줄어들었다. 이 때문에 관에서 직접 소금을 생산하여 그로부터 얻는 수익으로 진휼에 필요한 재원을 확보하려 하였다. 이에 호조(戶曹)에서는 국가에서 소금 생산 현황을 파악하여 적절한 양을 세금으로 거두어들이고, 이를 포(布)와 곡식으로 교환하여 국가 재정과 의창곡으로 활용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의정부의 반대로 이 논의는 중지되었다.

이후 1445년 또다시 흉년이 들자 다시 소금 생산에서 얻는 수익으로 진휼에 필요한 재원을 확보하는 방안을 강구하게 하였다. 세종의 적극적인 의지 하에 당시 세자였던 문종과 새로운 염법 시행에 적극적이었던 공조참판권맹손(權孟孫), 승지유의손(柳義孫)·황수신(黃守身) 등이 함께 염법을 실시하기 위한 구체적인 조치를 의논하였다. 또 권맹손의 건의에 따라 의염색이라는 기구를 설치하여 새로운 염법의 시행을 주관하도록 결정하였다.

의염색은 좌의정신개(申槩)와 우의정하연(河演)을 도제조로 하고, 좌참찬이숙치(李叔畤)와 호조판서정분(鄭苯), 공조참판권맹손 등 3명의 제조와 봉상시윤(奉常寺尹)이인손(李仁孫)을 비롯한 8명의 별감으로 구성되었다. 이와 같이 1445년 8월 의염색을 설치함으로써 새로운 염법인 의염제의 시행이 확정되었다.

내용 및 특징] [변천

의염법의 핵심은 그때까지 염세만 수납하던 것과는 달리 별도의 관서를 설치하여, 관에서 직접 소금을 생산하고 판매하는 것이었다. 제도를 시행한 당초에는 모든 소금 생산수단을 국가가 소유하고, 소금을 만드는 염간(鹽干)과 각사(各司)의 노자(奴子) 중에서 몇 명을 차출하여 소금을 생산할 계획이었다. 그리고 생산한 소금을 관에서 판매하여 그 수익의 1/3은 생산자에게 지급하고 나머지 2/3는 의창곡으로 활용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관에서 소금 생산과 판매를 독점하는 것에 부정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던 관료들이 반대하였다. 이로 인하여 기존의 소금 생산 시설과는 별도로 각 도에 염분을 1군데씩 설치하고 관에서 선군(船軍)을 시켜 소금을 생산하게 한 다음 그것을 판매하게 하였다. 이를 통하여 총 3,492석의 소금을 생산하였고, 이를 판매하여 포 737필과 잡곡 311석을 얻었고 소금 1,293석이 남았다.

이러한 성과에 자극을 받아 1445년 가을부터 전국에 걸쳐 더 많은 염분을 설치하여 관에서도 소금 생산과 판매에 종사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기존의 염법에 따라 운영되는 염분에 대해서는 의염색의 관원과 각 도 감사가 철저히 조사하여 염세 수입을 늘리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듬해인 1446년 의염제를 실시할 때 각 도에 파견된 경차관들은 기존의 염분은 침해하지 않고, 관에서 소유한 염분에서 선군을 사역하여 소금을 생산하도록 하는 규정을 지키지 않았다. 그들은 기존의 염간이 소유하던 염분을 빼앗아 소금 생산을 하게 하는 한편, 민간에서 소금을 판매하지 못하도록 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폐해와 함께 의염제 실시가 결정된 시점에 뜻하지 않게 민간에 소금이 귀해지는 현상이 생겼다. 그 원인은 장마가 들어 소금 생산이 원활하지 못했던 것도 있고, 의염제 실시로 인하여 사역에 동원되길 꺼려한 염간들이 소금 생산에 나서지 않았던 사정도 작용하였다. 또 의염제 실시로 인한 폐단 때문이기도 하였다.

이처럼 의염제를 전국적으로 실시한 초기부터 여러 가지 폐단이 생기고 또 민간에 소금이 귀해져 소금 값이 오르는 문제가 생기자, 의염제 실시를 중지하자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이에 1446년 5월경에 의염색을 혁파하였고 이로써 새로운 염법을 시행하여 의창곡으로 활용하려던 계획은 취소되고 말았다(『세종실록』 28년 5월 4일).

참고문헌

  • 박평식, 「조선 전기 염의 생산과 교역」, 『국사관논총』 76, 1997.
  • 김훈식, 「조선 초기 의창 제도 연구」,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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