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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중국 북송(北宋) 때 군사제도와 군사이론을 기록한 관찬병서(官撰兵書). | |
=='''개설'''== | =='''개설'''== | ||
− | + | 『무경총요(武經摠要)』는 북송(北宋)의 증공량(曾公亮)ㆍ정도(丁度) 등이 찬술하여, 1044년에 완성한 군사상의 기술서(技術書)로서 40권으로 되어 있다. 서하(西夏)의 반란이 일어난 뒤 송나라 인종은 병법에 뛰어난 인재를 구하여, 작전ㆍ군사기술 등의 지식을 정리시키고, 병기류의 그림을 그리도록 하였다. 전집(前集)ㆍ후집(後集)으로 나누어, 전집은 제도 15권과 변방 5권으로, 후집은 병전(兵戰)의 고사(故事) 15권과 점후(占候) 5권으로 기술해 놓았다. | |
=='''편찬/발간 경위'''== | =='''편찬/발간 경위'''== | ||
− | + | 송나라 때인 1230년에 초간 되었으나, 현재 전하는 판본으로는 명(明)나라의 정통(正統)ㆍ만력(萬曆) 간본이 있고, 『사고전서진본초집(四庫全書珍本初集)』에도 수록되어 있다. 내용 중 화약에 관한 기록은 이채를 띠고 있다. | |
− | + | =='''서지 사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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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책으로 구성되어 있고, 목판본이다. 크기는 세로 27.4cm, 가로 16cm이며,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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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구성/내용'''== | ||
− | + | 『무경총요(武經總要)』는 북송(北宋) 때 군사제도와 군사이론을 기록한 중국 최초의 관찬병서(官撰兵書)이다. 산천ㆍ지리와 관련된 내용을 상세히 기술하고 있어, 당시 송나라가 처한 지리적 역사적 상황을 살피는 데 매우 귀중한 참고자료가 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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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송 때는 오늘날의 하남성 개봉시(開封市)가 송나라의 수도였고, 북경지역은 요(遼)나라 영토에 소속되어 처음에는 남경(南京)이라고 했다가 나중에 다시 연경(燕京)으로 변경되었다. 그러므로 『무경총요』에서는 연경이 송나라의 ‘변방(邊防)’ 부문에 편입되어 그 산천과 지리가 다루어지고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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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또한 『무경총요(武經總要)』에는 오늘날 흑색화약이라고 하는 초보적인 추진제의 제조법이 기록되어 있으며, 이것을 에너지원(源)으로 해서 대형의 화살을 사용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흑색화약은 숯ㆍ초석(硝石)ㆍ황 등을 혼합해서 만드는데, 중국에서는 굵은 대나무 통에 이것을 채워 넣고 화살촉이 붙은 가느다란 대나무에 묶어, 처음에는 활로, 후에는 목제(木製)의 발사대에서 발사하여 무기로 사용하였다. 이것을 화전(火箭)이라 하였는데, 중국은 1232년에 성(城)을 포위한 몽골군에게 화전을 사용해서 반격했다고 한다. 원군(元軍)이 일본을 침공했을 때도 이 화전을 사용했다고 한다. 중국의 화전제조 기술은 인도나 아라비아를 거쳐, 150년 후에는 유럽에 전해졌고, 특히 이탈리아에서는 쏘아 올리는 불꽃을 뜻하는 로케타(rocchetta)라 불리어 오늘날의 로켓의 어원이 되었다고 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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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의 병서가 우리나라에 소개된 것은 이미 고려시대부터였고, 이를 통해 조선 초기에 병서의 주해를 붙이고 우리나라 전쟁 사실 기록과 우리나라 실정에 맞는 병법서를 간행하였다. 게다가 선초 유학자들은 주공(周公)이래로 병학(兵學)이 유가(儒家)와 병존하였다고 인식하였다. 그러나 병서가 유학자들의 필독서로 자리매김하기까지는 여전히 거리가 있었다. 이런 병서는 임진왜란 이후 이해와 관심의 폭이 넓어져, 더 이상 잡서가 아닌 실용학문으로 그 위상이 높아지게 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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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6세기 이래 조선의 유학자들은 시문(詩文)이나 경사(經史) 이외의 학문은 잡학(雜學)으로 치부하였다. 특히 병서(兵書)ㆍ천문ㆍ지리서 등이 유학자들의 외면을 받아 왔다. 정탁과 같은 이는 푸대접의 학문인 병서에 많은 관심을 기울여 왔으며, 두 차례의 중국 사행을 통해서 병법에 대한 지식을 습득하였다. 이는 당시 사회전반에 만연한 성리학중심의 일변도와는 그 궤도를 달리하는 학문적 모습이었다. 그가 병법에 대한 수용적인 측면은 『무경총요』와 『기효신서』, 그리고 명나라 유학자 호환(胡煥)에게 보낸 편지에게 구체적인 양상이 드러나고 있다. 정탁은 이들 병서 속에 담겨진 병법을 효율적으로 이해하고 수용하여, 임진왜란이라는 미증유의 국가적 위난을 슬기롭게 극복하는 데 일익을 담당하였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의 유학자들은 병서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더 이상 병서를 천시하지 않고, 학문의 영역으로 수용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왜구를 막아내는 것을 목적으로 찬술된 『기효신서』는 학문의 한 영역으로 부상하기에 이르렀으며, 이런 병법서들은 18세기 이후 실학 시대에 오면서, 실용적인 학문으로 수용되었다. | ||
− | + | 또 한 가지 『무경총요』에서 특기할 사항은 연경의 지리를 설명하는 내용 가운데 조선하(朝鮮河)라는 이름이 등장한다는 사실이다. 당시 요나라 수도 중경(中京)은 오늘날의 내몽고자치구 적봉시(赤峰市) 영성현(寧城縣)에 자리 잡고 있었다. 따라서 연경에서 요나라의 수도 중경에 가려면 북문(北門)을 나가서 고장성(古長城)을 지나고, 망경(望京)(지금의 북경시 조양구 망경), 온여하ㆍ순주(지금의 북경 순의구), 단주(지금의 북경 밀운현), 고북구(古北口)를 거쳐서 북쪽으로 가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고북구에 당도하기 전에 먼저 조선하를 건너서 간다고, 이 책은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 |
− | + | “연경에서 중경을 가는 도중에 조선하를 지나서 고북구에 도달한다.”라고 한 『무경총요』의 기록에 따르면, 조선하는 고북구 서쪽에 위치해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현재 중국지도상에서 찾아보면 조하(潮河)는 고북구 서쪽에 있고 난하(灤河)는 고북구 동쪽에 있다. 이는 바로 오늘의 조하(潮河)가 송나라 때는 조선하로 불렸다는 확실한 증거가 된다. 즉 조선하가 압록강 이남 지역의 평양이나 서울 일대가 아닌 북경 부근에 있었다는 것은, 고대의 조선은 한반도가 주무대가 아니라, 대륙 깊숙이 중원의 요서지역에 자리하고 있었던 사실을 단적으로 증명한다. | |
− | ==''' | + | =='''의의와 평가'''== |
− | + | 『무경총요』는 ‘손자병법’처럼 전략적 수준의 고담준론이 아니라, 병기ㆍ진형 등 전쟁에 필요한 보다 구체적이고 기술적인 부분을 상세하게 다룬 책이다. 『무경총요』가 쓰여진 지 600여 년이 흐른 후에 비슷한 성격의 책이면서, 보다 광범위하고 다양한 내용을 담은 『무비지(武備志)』가 나왔다. 하지만 오늘날 『무경총요』의 가치는 『무비지』에 비해 조금도 떨어지지 않는다. | |
− | + | 『무경총요』는 이런 종류의 책 가운데 가장 연대가 올라가는 서적이다. 더구나 이 책의 무기 설명 중에는 『무비지』에도 없는 내용이 많아서, 송나라뿐만 아니라, 그 이전 한ㆍ당 시기의 무기를 추정 비교 연구하는 데도 유익하다. 특히 『무경총요』는 중국을 포함한 동북아시아 국가의 고전적 공성무기를 연구하는 데 거의 절대적인 사료 가치를 가지고 있다. | |
=='''참고문헌'''== | =='''참고문헌'''== | ||
− | * | + | *김호준, 「고려 대몽항쟁기의 축성과 입보」, 충북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3. |
− | + | *베이징대학교 중국전통문화연구중심, 『중국문명대시야』, 김영사, 2007. | |
− | + | *청위ㆍ장허성, 이원길 역, 『중국을 말한다』, 신원문화사, 2008. | |
− | + | *황만기, 「정탁(鄭琢)의 병법 수용 양상 연구」, 『영남학』 제25호, 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 201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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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분류: | + | [[분류:군사기술서]][[분류:한문]][[분류:중국]][[분류:송]][[분류:인종]] |
2017년 12월 22일 (금) 01:19 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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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무경총요 |
한글표제 | 무경총요 |
한자표제 | 武經總要 |
분야 | 군사기술서 |
유형 | 한문 |
지역 | 중국 |
시대 | 송 |
왕대 | 인종 |
집필자 | 성낙수 |
저편자 | 증공량 |
간행년일 | 1040 |
권책수 | 2책 |
소장처 | 규장각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무경총요(武經總要) |
중국 북송(北宋) 때 군사제도와 군사이론을 기록한 관찬병서(官撰兵書).
개설
『무경총요(武經摠要)』는 북송(北宋)의 증공량(曾公亮)ㆍ정도(丁度) 등이 찬술하여, 1044년에 완성한 군사상의 기술서(技術書)로서 40권으로 되어 있다. 서하(西夏)의 반란이 일어난 뒤 송나라 인종은 병법에 뛰어난 인재를 구하여, 작전ㆍ군사기술 등의 지식을 정리시키고, 병기류의 그림을 그리도록 하였다. 전집(前集)ㆍ후집(後集)으로 나누어, 전집은 제도 15권과 변방 5권으로, 후집은 병전(兵戰)의 고사(故事) 15권과 점후(占候) 5권으로 기술해 놓았다.
편찬/발간 경위
송나라 때인 1230년에 초간 되었으나, 현재 전하는 판본으로는 명(明)나라의 정통(正統)ㆍ만력(萬曆) 간본이 있고, 『사고전서진본초집(四庫全書珍本初集)』에도 수록되어 있다. 내용 중 화약에 관한 기록은 이채를 띠고 있다.
서지 사항
2책으로 구성되어 있고, 목판본이다. 크기는 세로 27.4cm, 가로 16cm이며,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구성/내용
『무경총요(武經總要)』는 북송(北宋) 때 군사제도와 군사이론을 기록한 중국 최초의 관찬병서(官撰兵書)이다. 산천ㆍ지리와 관련된 내용을 상세히 기술하고 있어, 당시 송나라가 처한 지리적 역사적 상황을 살피는 데 매우 귀중한 참고자료가 된다.
북송 때는 오늘날의 하남성 개봉시(開封市)가 송나라의 수도였고, 북경지역은 요(遼)나라 영토에 소속되어 처음에는 남경(南京)이라고 했다가 나중에 다시 연경(燕京)으로 변경되었다. 그러므로 『무경총요』에서는 연경이 송나라의 ‘변방(邊防)’ 부문에 편입되어 그 산천과 지리가 다루어지고 있다.
또한 『무경총요(武經總要)』에는 오늘날 흑색화약이라고 하는 초보적인 추진제의 제조법이 기록되어 있으며, 이것을 에너지원(源)으로 해서 대형의 화살을 사용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흑색화약은 숯ㆍ초석(硝石)ㆍ황 등을 혼합해서 만드는데, 중국에서는 굵은 대나무 통에 이것을 채워 넣고 화살촉이 붙은 가느다란 대나무에 묶어, 처음에는 활로, 후에는 목제(木製)의 발사대에서 발사하여 무기로 사용하였다. 이것을 화전(火箭)이라 하였는데, 중국은 1232년에 성(城)을 포위한 몽골군에게 화전을 사용해서 반격했다고 한다. 원군(元軍)이 일본을 침공했을 때도 이 화전을 사용했다고 한다. 중국의 화전제조 기술은 인도나 아라비아를 거쳐, 150년 후에는 유럽에 전해졌고, 특히 이탈리아에서는 쏘아 올리는 불꽃을 뜻하는 로케타(rocchetta)라 불리어 오늘날의 로켓의 어원이 되었다고 한다.
중국의 병서가 우리나라에 소개된 것은 이미 고려시대부터였고, 이를 통해 조선 초기에 병서의 주해를 붙이고 우리나라 전쟁 사실 기록과 우리나라 실정에 맞는 병법서를 간행하였다. 게다가 선초 유학자들은 주공(周公)이래로 병학(兵學)이 유가(儒家)와 병존하였다고 인식하였다. 그러나 병서가 유학자들의 필독서로 자리매김하기까지는 여전히 거리가 있었다. 이런 병서는 임진왜란 이후 이해와 관심의 폭이 넓어져, 더 이상 잡서가 아닌 실용학문으로 그 위상이 높아지게 되었다.
16세기 이래 조선의 유학자들은 시문(詩文)이나 경사(經史) 이외의 학문은 잡학(雜學)으로 치부하였다. 특히 병서(兵書)ㆍ천문ㆍ지리서 등이 유학자들의 외면을 받아 왔다. 정탁과 같은 이는 푸대접의 학문인 병서에 많은 관심을 기울여 왔으며, 두 차례의 중국 사행을 통해서 병법에 대한 지식을 습득하였다. 이는 당시 사회전반에 만연한 성리학중심의 일변도와는 그 궤도를 달리하는 학문적 모습이었다. 그가 병법에 대한 수용적인 측면은 『무경총요』와 『기효신서』, 그리고 명나라 유학자 호환(胡煥)에게 보낸 편지에게 구체적인 양상이 드러나고 있다. 정탁은 이들 병서 속에 담겨진 병법을 효율적으로 이해하고 수용하여, 임진왜란이라는 미증유의 국가적 위난을 슬기롭게 극복하는 데 일익을 담당하였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의 유학자들은 병서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더 이상 병서를 천시하지 않고, 학문의 영역으로 수용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왜구를 막아내는 것을 목적으로 찬술된 『기효신서』는 학문의 한 영역으로 부상하기에 이르렀으며, 이런 병법서들은 18세기 이후 실학 시대에 오면서, 실용적인 학문으로 수용되었다.
또 한 가지 『무경총요』에서 특기할 사항은 연경의 지리를 설명하는 내용 가운데 조선하(朝鮮河)라는 이름이 등장한다는 사실이다. 당시 요나라 수도 중경(中京)은 오늘날의 내몽고자치구 적봉시(赤峰市) 영성현(寧城縣)에 자리 잡고 있었다. 따라서 연경에서 요나라의 수도 중경에 가려면 북문(北門)을 나가서 고장성(古長城)을 지나고, 망경(望京)(지금의 북경시 조양구 망경), 온여하ㆍ순주(지금의 북경 순의구), 단주(지금의 북경 밀운현), 고북구(古北口)를 거쳐서 북쪽으로 가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고북구에 당도하기 전에 먼저 조선하를 건너서 간다고, 이 책은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연경에서 중경을 가는 도중에 조선하를 지나서 고북구에 도달한다.”라고 한 『무경총요』의 기록에 따르면, 조선하는 고북구 서쪽에 위치해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현재 중국지도상에서 찾아보면 조하(潮河)는 고북구 서쪽에 있고 난하(灤河)는 고북구 동쪽에 있다. 이는 바로 오늘의 조하(潮河)가 송나라 때는 조선하로 불렸다는 확실한 증거가 된다. 즉 조선하가 압록강 이남 지역의 평양이나 서울 일대가 아닌 북경 부근에 있었다는 것은, 고대의 조선은 한반도가 주무대가 아니라, 대륙 깊숙이 중원의 요서지역에 자리하고 있었던 사실을 단적으로 증명한다.
의의와 평가
『무경총요』는 ‘손자병법’처럼 전략적 수준의 고담준론이 아니라, 병기ㆍ진형 등 전쟁에 필요한 보다 구체적이고 기술적인 부분을 상세하게 다룬 책이다. 『무경총요』가 쓰여진 지 600여 년이 흐른 후에 비슷한 성격의 책이면서, 보다 광범위하고 다양한 내용을 담은 『무비지(武備志)』가 나왔다. 하지만 오늘날 『무경총요』의 가치는 『무비지』에 비해 조금도 떨어지지 않는다.
『무경총요』는 이런 종류의 책 가운데 가장 연대가 올라가는 서적이다. 더구나 이 책의 무기 설명 중에는 『무비지』에도 없는 내용이 많아서, 송나라뿐만 아니라, 그 이전 한ㆍ당 시기의 무기를 추정 비교 연구하는 데도 유익하다. 특히 『무경총요』는 중국을 포함한 동북아시아 국가의 고전적 공성무기를 연구하는 데 거의 절대적인 사료 가치를 가지고 있다.
참고문헌
- 김호준, 「고려 대몽항쟁기의 축성과 입보」, 충북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3.
- 베이징대학교 중국전통문화연구중심, 『중국문명대시야』, 김영사, 2007.
- 청위ㆍ장허성, 이원길 역, 『중국을 말한다』, 신원문화사, 2008.
- 황만기, 「정탁(鄭琢)의 병법 수용 양상 연구」, 『영남학』 제25호, 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