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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사역원의 중국어 교육에서 사용한 한어 중급 교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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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시대부터 전해진 중국어 학습서.
  
 
=='''개설'''==
 
=='''개설'''==
  
『박통사(朴通事)』는 조선사역원에서 중국어의 학습에 사용한 교과서였다. 『노걸대』와 자매편으로 이 둘을 함께 『노박』으로 줄여 불렀다. 원본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으나 후대의 수정본인 ‘산개본(刪改本)’, ‘신석본(新釋本)’이 있고 한글 발명 이후에 ‘번역본’, ‘언해본’이 간행되었다. ‘번역본’은 국회도서관에 을해자(乙亥字)본의 복각본이 상권만 전하며, 그 밖의 것은 한국과 세계 여러 곳에 다수 현전한다. 『박통사』의 ‘박(朴)’은 우리 고유의 성(姓)이며 ‘통사(通事)’는 역관의 통칭이었다. 따라서 박씨 성을 가진 역관이라는 뜻으로 고려역관을 말하였다. 『노걸대』가 비교적 짧고 간단한 문장으로 되었다면, 『박통사』는 길고 전문적이며 어려운 내용으로 되었기 때문에 전자를 초급 교재, 후자를 중급 교재로 보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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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통사(朴通事)』는 『노걸대(老乞大)』와 같이 고려시대부터 있었던 한어(중국어) 학습서로, 『노걸대』보다는 수준 높은 고급 회화 교재였다. 본문의 내용은 주로 당시의 중국 및 중국인의 생활에 관한 회화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편자와 간행 연대를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대체로 고려 말부터 조선 초기까지 중국어 회화 교과서로 쓰였다.
  
 
=='''편찬/발간 경위'''==
 
=='''편찬/발간 경위'''==
  
『박통사』의 원본은 전하지 않으나 조선 중종대에 최세진(崔世珍)이 편찬한 『노박집람(老朴集覽)』에 ‘구본(舊本) 박통사’가 자주 등장하였다. 이것이 『박통사』의 원본을 말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는 연구가 있었다. 따라서 『노걸대』의 원본처럼 원(元)대에 새로 등장한 한어(漢語)를 교육하기 위하여 고려말에 사역원의 역관들이 편찬한 한어 교재로 여겨진다. 이 교재는 성종대에 명인(明人) 갈귀(葛貴)가 『노걸대』를 산개(刪改)하면서 이를 함께 수정한 산개 『박통사』가 있고 이를 중종대에 정음(正音)으로 주음하고 우리말로 언해한 번역 『박통사』가 있다. 조선 영조 연간에 『노걸대』를 신석할 때에 역시 이를 수정하여 『신석박통사(新釋朴通事)』와 『신석박통사언해(新釋朴通事諺解)』를 간행하였다. 다만 『노걸대』와 달리 『박통사』는 ‘중간본’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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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통사』의 정확한 간행 연대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고려 말부터 교제로 사용되어 조선 초기에는 이미 중국어 학습서로써 자리매김 하고 있었다.([http://sillok.history.go.kr/id/kda_10506023_007 『세종실록』 5년 6월 23일]),([http://sillok.history.go.kr/id/kda_10808016_007 『세종실록』 8년 8월 16일]) 한편 16세기 초에 최세진(崔世珍)이 『박통사』를 번역하여 『번역박통사』를 펴냈는데, 상ㆍ중ㆍ하로 이루어져 있었던 이 책은 현재 상권만이 전하고 있다. 간행년도가 분명하지 않으나, 『사성통해(四聲通解)』에 「번역노걸대(飜譯老乞大)」ㆍ「박통사범례(朴通事凡例)」가 실려 있는 점으로 미루어, 1517년(중종 12) 이전의 일로 추정된다.
  
『박통사』의 원본은 『노걸대』와 같이 고려말에 편찬되었다. 현전하는 『박통사』의 내용 가운데 1346년(원 혜종 14)에 대도(大都)에서 설법(說法)한 보우(普愚) 화상(和尙)의 이야기가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시기에 원나라를 여행한 고려역관의 편찬으로 본다. 이 원본은 조선 성종대에 『노걸대』와 함께 산개되었다. 즉, 1480년(성종 11) 경연에서 시독관이창신이 지난번에 명령을 받고 한어를 두목 대경에게 질정하였는데, 대경이 『노걸대』와 『박통사』를 보고 “이것은 바로 원나라 때의 말이므로, 지금의 중국말[華語]과는 매우 달라서, 이해하지 못할 데가 많이 있다.”고 하고, 즉시 지금의 말로 두어 구절을 고치니 모두 해독할 수 있었다면서, 한어에 능한 자로 하여금 모두 고치게 하자고 아뢰었고 성종이 이를 받아들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ia_11110019_003 『성종실록』 11년 10월 19일]). 이로 볼 때 이 시기에 『노걸대』와 더불어 불필요한 곳은 잘라 내고 틀린 곳은 고쳐서 산개(刪改)하였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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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해본도 이미 존재했던 것 같지만 이 초간본은 병란으로 소실되고, 후에 『노걸대』와 『박통사』의 요점을 추려서 주석을 붙여 해석한 『노박집람(老朴輯覽)』을 참고해, 1677년(숙종 3년) 권대운(權大運)ㆍ박세화(朴世華) 등이 다시 고증하여, 『박통사언해』를 간행했다. 후에 다시 내용을 수정한 『박통사신석(朴通事新釋)』을 만들고 언해하였는데, 『통문관지(通文館志)』 권8에는 「신석박통사」 및 「신석박통사언해」라 기록되어 있다. 본문 글자마다 한글로 붙인 중국의 정음(正音)과 속음(俗音)의 두 종류 발음표기와 구절마다 언해문을 붙인 체재로 되어 있다. 다른 언해본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직역체이며, 원문과 언해문 사이에 권표(圈標), 구 사이에 'ㄴ'표가 표시되어 있다.
  
이 ‘산개본’은 중종 연간에 최세진이 정음으로 번역하고 우리말로 언해하였다. 이때에 번역되어 을해자(乙亥字) 활자로 인쇄된 것의 복각 목판본 중 상권만 국회도서관에 소장되었다. 그리고 왜란(倭亂)과 호란(胡亂) 이후에 『노걸대』를 언해할 때에 『박통사』도 함께 언해하여 『박통사언해』라는 이름으로 간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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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지 사항'''==
  
=='''서지 사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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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3권으로 되어 있으며, 지질은 한지이다.
  
원본이 전하지 않아 알 수 없다. 다만 산개 『박통사』와 『박통사언해(朴通事諺解)』·『신석박통사』와 그 언해본은 여러 곳에 현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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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대한민국 국회도서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1959년 경북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연구실에서 영인본을 간행하였다.
  
 
=='''구성/내용'''==
 
=='''구성/내용'''==
  
『박통사』는 처음부터 106과()나누어 장면을 설정하고 그에 맞는 대화를 소재로 하여 만든 한어 교재였다. 『노걸대』가 대도(大都)로 가는 여정(旅程)을 연속적으로 그린 것임에 비하여 『박통사』는 그러한 연결 없이 각 과()를 독자적으로 나눈 것이 특징이었다. 각 과의 주제는 당시의 북경, 즉 원나라의 수도인 대도에서 고려역관들이 수행할 임무와 생활의 모습이었다. 『박통사』는 『노걸대』와 함께 조선사역원의 각종 시험에서 출제서로 사용하였다. 즉, 사역원의 외국어 평가인 고강(考講)이나 원시(院試)에서는 『박통사』에서 빠지지 않고 출제되었다. 그리고 역관들에게 가장 중요한 최종 시험인 역과(譯科)에서는 『노걸대』가 초시(初試)·복시(覆試)모두 출제되었지만 『박통사』는 복시에만 출제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만큼 『노걸대』보다는 어려운 교재로 인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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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관은 외국어 통역을 전담하는 관리로서, 요즘으로 치면 외교관이나 통역사이다. 조선시대에는 외국어 전문 교육기관인 사역원(司譯院)을 두고 이곳에서 집중적으로 역관을 양성하였다. 사역원은 조선시대 내내 존속하면서 ‘사대교린’이라는 조선의 기본 외교 방침에 적합한 인재를 양성했다. 사역원에서는 회화, 강서(講書), 사자(寫字), 번역 등의 분야로 나누어, 체계적인 외국어 학습을 했으며, 여기서 양성된 역관들은 외교의 일선에서, 그리고 국제무역에도 깊숙이 참여하며 시대의 변화를 이끄는 한 주역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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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역원에서는 당시의 4대 외국어인 중국어, 몽골어, 만주어, 일본어를 가르쳤는데, 한학청, 몽학청, 청학청, 왜학청이라 불린 관청에서 각각 전담했다. 또 우어청(偶語廳)이라 하여, 하루 종일 외국어로만 대화하도록 한 회화 교실도 있었다. 당시의 제1외국어는 당연히 중국어였고, 사역원에서도 한학청의 규모가 가장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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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통사』에서 ‘박’은 성()으로 ‘박씨’를 가리키는 것이고, ‘통사’는 본래 명()나라 때 예부(禮部)에 속해 있는 관직명으로 외국어 역관의 일을 맡았던 관직이다. ‘노걸대’라는 명칭이 몽고어의 영향에서 이루어진 것이라면, ‘박통사’는 한국식의 책 이름이라 할 수 있다. 일설에는 ‘중국통’을 의미하는 ‘노걸대’는 중국인 역관에 대한 경칭이며, ‘박통사’는 고려인 통역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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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통사』는 『노걸대』에 비하여 그 내용이 일반 풍속, 문물 등 생활에 관계된 것이 많다. 모두 106절로 나뉘었고 일관된 이야기가 없이 1회 완결의 형식을 지니고 있다. 『노걸대』와 마찬가지로 중국어 발음과 우리말을 병기하였는데, 『노걸대』가 상인의 무역 활동을 주로 한 ‘상업 회화’에 가까운 것에 비해서, 『박통사』에서는 일상생활에 관한 내용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또한 『노걸대』와 함께 고려 말에 편집된 것으로 추정된다. 중국어와 한국어의 생생한 모습뿐 아니라 당대의 풍속 및 문물 제도까지도 접할 수 있는 자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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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成宗) 때 산개(刪改)된 『박통사』는 고려 때 편찬된 원간본 『박통사』가 당시의 중국어와 괴리가 있자, 한어문을 당시의 현실에 맞게 수정한 것이다. 하지만 현재 원간본이 전하지 않고 있어, 산개할 때 수정된 내용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기 어렵다. 그러나 한어문(漢語文)에 나타나는 관청명·관직명·행정구역명·성문명·궁궐 내 건물명 등 시의성을 가지는 단어를 대상으로, 이들 중 원대(元代)의 명칭이 명대(明代)의 것으로 변경된 것을 추출할 수 있다. 명대의 명칭을 반영한 것은 모두 산개 시에 수정된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박통사』는 국어사뿐만 풍속사, 문화사, 경제사 등 여러 영역의 사료로서 중요한 가치를 지니는데, 현존 최고본(最古本)인 산개본에는 신구(新舊)의 내용이 공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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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통사』의 자료는 언어사와 문화사의 가치가 높아서, 일찍이 많은 언어사와 문화사 분야의 연구 결과가 축적되어 있다. 그러나 중국어 교재라는 본래의 성격에 대한 연구는 상대적으로 희소한 상황이다.
  
『박통사』는 고려역관들이 원나라의 수도인 대도에서 어떤 역할을 하였고 어떻게 생활하였는지를 보여 주었다. 즉, 모두 106과의 주제가 역관들의 역할과 생활상이었기 때문에 자료를 통하여 당시 역관들의 참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예를 들면 『박통사』의 제1과는 북경에 주재하는 역관들이 함께 모여 봄철에 상화(賞花) 연석(宴席)을 마련하는 장면이었다. 그를 위하여 돈을 추렴하고 그 돈으로 음식과 과일을 장만하며 광록시(光祿寺)에서 술을 구하고 교방사(敎坊司)에서 연희(演戱)하는 이를 불러오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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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중국에 가서 상업거래를 하는 고려인(혹은 조선인)을 위한 일종의 특수목적의 교재이다. 이 교재에 대한 분석을 통하여 고려, 조선의 선인들이 중국어 교재집필을 함에 있어서, 언어와 문화의 관계가 긴밀하고 중요함을 인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내용의 구성에서 당시 중국사회와 문화의 이모저모를 고려하였을 뿐만 아니라, 상거래 목적의 문화 간 의사소통의 기능을 부각시키어, 기능과 문화를 세밀하게 결합시키었다. 또한 집필 전과정을 통하여, 요소요소 구석구석 학습자를 배려하여 학습자 중심의 원칙을 구현하였다. 또한 실용성, 맞춤성, 지식성, 흥미성이 적재적소에서 빠짐없이 잘 드러난다.
  
이 과에서 술을 관리하는 관청에서 술을 얻거나 다른 물건을 받아 올 때에 감합(勘合)이 필요한 사정을 알 수 있었다. 또 광록시의 관원인 관부(館夫)의 역할과 그들과의 접촉에서 필요한 예절들을 살필 있고, 당시 연회에서 사용하는 여러 음식의 종류와 그 제법을 보여 주기도 하였다. 그리고 음악과 연희(演戱)를 담당한 교방사(敎坊司)로부터 악공(樂工)들과 가인(歌人)들을 연석(宴席)에 불러오는 장면을 소재로 한 대화로부터 이 시대에 관리들의 연회(宴會) 문화를 엿볼 수 있었다. 106과가 모두 이러한 당시의 생활상을 내용으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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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박통사』는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 가장 오래된 서유기인 『서유기평화(西流記平話)』의 내용이 부분적으로 소개되고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극중 드문드문 등장하는 대화 내용을 통해, ‘황풍괴’나 ‘홍해아’, ‘화염산’, ‘여인국’ 등 『서유기(西遊記)』의 주요 사건들이 당시의 고려 사람들에게도 잘 알려져 있었음을 확인할 있다. 이는 일본보다 훨씬 앞선 것이다. 또한 『서유기』의 가장 유명한 등장인물인 ‘저팔계(猪八戒)’를 ‘주팔계(朱八戒)’로 표기한 점도 눈에 띄는데, 우리가 알고 있는 ‘저팔계’라는 이름은 원래 명의 태조홍무제의 성이 주()씨인 관계로 명대에 음이 비슷한 저()로 고쳐 쓴 것으로 여겨진다. 『노걸대』와 마찬가지로 중세 한국어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꼽힌다.
  
 
=='''참고문헌'''==       
 
=='''참고문헌'''==       
*정광, 『역학서 연구』, J&C,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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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양진(金亮鎭)ㆍ여채려(余彩麗), 「『박통사』 내 난해 한어의 어휘사적 연구」, 『중국언어연구』52 , 한국중국언어학회, 2014.     
*정광, 『조선시대의 외국어 교육』, 김영사,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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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조, 『박통사 신석언해』, 홍문각, 1985.       
*정광, 「<노박집람>과 <노걸대>·<박통사>의 구본」, 『진단학보』 89,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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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주연, 『노걸대와 박통사의 언어』, 태학사, 19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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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오진, 『노걸대 박통사 연구 : 한어문에 보이는 어휘와 문법의 특징을 중심으로』, 태학사,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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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22일 (금) 01:21 판



고려 시대부터 전해진 중국어 학습서.

개설

『박통사(朴通事)』는 『노걸대(老乞大)』와 같이 고려시대부터 있었던 한어(중국어) 학습서로, 『노걸대』보다는 수준 높은 고급 회화 교재였다. 본문의 내용은 주로 당시의 중국 및 중국인의 생활에 관한 회화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편자와 간행 연대를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대체로 고려 말부터 조선 초기까지 중국어 회화 교과서로 쓰였다.

편찬/발간 경위

『박통사』의 정확한 간행 연대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고려 말부터 교제로 사용되어 조선 초기에는 이미 중국어 학습서로써 자리매김 하고 있었다.(『세종실록』 5년 6월 23일),(『세종실록』 8년 8월 16일) 한편 16세기 초에 최세진(崔世珍)이 『박통사』를 번역하여 『번역박통사』를 펴냈는데, 상ㆍ중ㆍ하로 이루어져 있었던 이 책은 현재 상권만이 전하고 있다. 간행년도가 분명하지 않으나, 『사성통해(四聲通解)』에 「번역노걸대(飜譯老乞大)」ㆍ「박통사범례(朴通事凡例)」가 실려 있는 점으로 미루어, 1517년(중종 12) 이전의 일로 추정된다.

언해본도 이미 존재했던 것 같지만 이 초간본은 병란으로 소실되고, 후에 『노걸대』와 『박통사』의 요점을 추려서 주석을 붙여 해석한 『노박집람(老朴輯覽)』을 참고해, 1677년(숙종 3년) 권대운(權大運)ㆍ박세화(朴世華) 등이 다시 고증하여, 『박통사언해』를 간행했다. 후에 다시 내용을 수정한 『박통사신석(朴通事新釋)』을 만들고 언해하였는데, 『통문관지(通文館志)』 권8에는 「신석박통사」 및 「신석박통사언해」라 기록되어 있다. 본문 글자마다 한글로 붙인 중국의 정음(正音)과 속음(俗音)의 두 종류 발음표기와 구절마다 언해문을 붙인 체재로 되어 있다. 다른 언해본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직역체이며, 원문과 언해문 사이에 권표(圈標), 구 사이에 'ㄴ'표가 표시되어 있다.

서지 사항

총 3권으로 되어 있으며, 지질은 한지이다.

현재 대한민국 국회도서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1959년 경북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연구실에서 영인본을 간행하였다.

구성/내용

역관은 외국어 통역을 전담하는 관리로서, 요즘으로 치면 외교관이나 통역사이다. 조선시대에는 외국어 전문 교육기관인 사역원(司譯院)을 두고 이곳에서 집중적으로 역관을 양성하였다. 사역원은 조선시대 내내 존속하면서 ‘사대교린’이라는 조선의 기본 외교 방침에 적합한 인재를 양성했다. 사역원에서는 회화, 강서(講書), 사자(寫字), 번역 등의 분야로 나누어, 체계적인 외국어 학습을 했으며, 여기서 양성된 역관들은 외교의 일선에서, 그리고 국제무역에도 깊숙이 참여하며 시대의 변화를 이끄는 한 주역이 되었다.

사역원에서는 당시의 4대 외국어인 중국어, 몽골어, 만주어, 일본어를 가르쳤는데, 한학청, 몽학청, 청학청, 왜학청이라 불린 관청에서 각각 전담했다. 또 우어청(偶語廳)이라 하여, 하루 종일 외국어로만 대화하도록 한 회화 교실도 있었다. 당시의 제1외국어는 당연히 중국어였고, 사역원에서도 한학청의 규모가 가장 컸다.

『박통사』에서 ‘박’은 성(性)으로 ‘박씨’를 가리키는 것이고, ‘통사’는 본래 명(明)나라 때 예부(禮部)에 속해 있는 관직명으로 외국어 역관의 일을 맡았던 관직이다. ‘노걸대’라는 명칭이 몽고어의 영향에서 이루어진 것이라면, ‘박통사’는 한국식의 책 이름이라 할 수 있다. 일설에는 ‘중국통’을 의미하는 ‘노걸대’는 중국인 역관에 대한 경칭이며, ‘박통사’는 고려인 통역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한다.

『박통사』는 『노걸대』에 비하여 그 내용이 일반 풍속, 문물 등 생활에 관계된 것이 많다. 모두 106절로 나뉘었고 일관된 이야기가 없이 1회 완결의 형식을 지니고 있다. 『노걸대』와 마찬가지로 중국어 발음과 우리말을 병기하였는데, 『노걸대』가 상인의 무역 활동을 주로 한 ‘상업 회화’에 가까운 것에 비해서, 『박통사』에서는 일상생활에 관한 내용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또한 『노걸대』와 함께 고려 말에 편집된 것으로 추정된다. 중국어와 한국어의 생생한 모습뿐 아니라 당대의 풍속 및 문물 제도까지도 접할 수 있는 자료다.

성종(成宗) 때 산개(刪改)된 『박통사』는 고려 때 편찬된 원간본 『박통사』가 당시의 중국어와 괴리가 있자, 한어문을 당시의 현실에 맞게 수정한 것이다. 하지만 현재 원간본이 전하지 않고 있어, 산개할 때 수정된 내용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기 어렵다. 그러나 한어문(漢語文)에 나타나는 관청명·관직명·행정구역명·성문명·궁궐 내 건물명 등 시의성을 가지는 단어를 대상으로, 이들 중 원대(元代)의 명칭이 명대(明代)의 것으로 변경된 것을 추출할 수 있다. 명대의 명칭을 반영한 것은 모두 산개 시에 수정된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박통사』는 국어사뿐만 풍속사, 문화사, 경제사 등 여러 영역의 사료로서 중요한 가치를 지니는데, 현존 최고본(最古本)인 산개본에는 신구(新舊)의 내용이 공존한다.

『박통사』의 자료는 언어사와 문화사의 가치가 높아서, 일찍이 많은 언어사와 문화사 분야의 연구 결과가 축적되어 있다. 그러나 중국어 교재라는 본래의 성격에 대한 연구는 상대적으로 희소한 상황이다.

이 책은 중국에 가서 상업거래를 하는 고려인(혹은 조선인)을 위한 일종의 특수목적의 교재이다. 이 교재에 대한 분석을 통하여 고려, 조선의 선인들이 중국어 교재집필을 함에 있어서, 언어와 문화의 관계가 긴밀하고 중요함을 인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내용의 구성에서 당시 중국사회와 문화의 이모저모를 고려하였을 뿐만 아니라, 상거래 목적의 문화 간 의사소통의 기능을 부각시키어, 기능과 문화를 세밀하게 결합시키었다. 또한 집필 전과정을 통하여, 요소요소 구석구석 학습자를 배려하여 학습자 중심의 원칙을 구현하였다. 또한 실용성, 맞춤성, 지식성, 흥미성이 적재적소에서 빠짐없이 잘 드러난다.

또한 『박통사』는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 가장 오래된 서유기인 『서유기평화(西流記平話)』의 내용이 부분적으로 소개되고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극중 드문드문 등장하는 대화 내용을 통해, ‘황풍괴’나 ‘홍해아’, ‘화염산’, ‘여인국’ 등 『서유기(西遊記)』의 주요 사건들이 당시의 고려 사람들에게도 잘 알려져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일본보다 훨씬 앞선 것이다. 또한 『서유기』의 가장 유명한 등장인물인 ‘저팔계(猪八戒)’를 ‘주팔계(朱八戒)’로 표기한 점도 눈에 띄는데, 우리가 알고 있는 ‘저팔계’라는 이름은 원래 명의 태조홍무제의 성이 주(朱)씨인 관계로 명대에 음이 비슷한 저(猪)로 고쳐 쓴 것으로 여겨진다. 『노걸대』와 마찬가지로 중세 한국어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꼽힌다.

참고문헌

  • 김양진(金亮鎭)ㆍ여채려(余彩麗), 「『박통사』 내 난해 한어의 어휘사적 연구」, 『중국언어연구』52 , 한국중국언어학회, 2014.
  • 김창조, 『박통사 신석언해』, 홍문각, 1985.
  • 석주연, 『노걸대와 박통사의 언어』, 태학사, 1969.
  • 양오진, 『노걸대 박통사 연구 : 한어문에 보이는 어휘와 문법의 특징을 중심으로』, 태학사,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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