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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락하고 명민하여 일을 처리하는 것이 종종 이치를 아는 군자들도 미치지 못하는 바가 있었다. 궁궐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나 세상 물정을 잘 알았고 여자들이 익혀야 할 자질구레한 일까지도 어느 것 하나 훌륭히 갖추지 않은 것이 없었다. 성격이 검소하여 화려한 치장을 하지 않았으며 조상의 제삿날이 되면 반드시 손수 제수를 장만하고 경건하게 제사를 지내 새벽녘까지 잠을 자지 않았으므로 종족들이 흐뭇한 마음으로 탄복하였다.[「유적비명」] | 화락하고 명민하여 일을 처리하는 것이 종종 이치를 아는 군자들도 미치지 못하는 바가 있었다. 궁궐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나 세상 물정을 잘 알았고 여자들이 익혀야 할 자질구레한 일까지도 어느 것 하나 훌륭히 갖추지 않은 것이 없었다. 성격이 검소하여 화려한 치장을 하지 않았으며 조상의 제삿날이 되면 반드시 손수 제수를 장만하고 경건하게 제사를 지내 새벽녘까지 잠을 자지 않았으므로 종족들이 흐뭇한 마음으로 탄복하였다.[「유적비명」] | ||
− | 한 번은 거처하던 집의 담장이 무너져 수리하려고 하자, 어떤 사람이 그 일은 이웃집과 분담해서 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옹주는 “내가 우리 집 담장을 수리하는 것인데 어찌 다른 사람들을 번거롭게 하겠는가. 더구나 이웃집은 나보다도 더 가난한 처지에 놓여 있으니 더더욱 안 될 일이다” 하였다. 같은 마을에 사는 이 정승( | + | 한 번은 거처하던 집의 담장이 무너져 수리하려고 하자, 어떤 사람이 그 일은 이웃집과 분담해서 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옹주는 “내가 우리 집 담장을 수리하는 것인데 어찌 다른 사람들을 번거롭게 하겠는가. 더구나 이웃집은 나보다도 더 가난한 처지에 놓여 있으니 더더욱 안 될 일이다” 하였다. 같은 마을에 사는 이 정승(李政丞)이 이 말을 듣고는 “이것이 비록 사소한 일이기는 하지만 또한 옹주의 어진 성품을 엿볼 수 있다” 하였다. 부마 유적의 동생 유영(柳潁)이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후 어린 아들들이 가난하게 지내자 자신이 낳은 자식처럼 돌보아 주었다. 하루는 임금이 사사로운 일로 안부를 묻자 옹주가 대답하기를 “늙은 몸이 의식을 걱정할 정도는 아닙니다만, 애비 없는 조카들 가운데 기이한 질병에 걸린 아이가 있는데도 가난하여 치료를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였다. 이에 임금이 감동하여 내의원으로 하여금 약을 보내 주라고 명하였다.[「유적비명」] |
=='''묘소 및 후손'''== | =='''묘소 및 후손'''== |
2018년 1월 9일 (화) 22:57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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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정정옹주 |
한글표제 | 정정옹주 |
한자표제 | 貞正翁主 |
분야 | 왕족/옹주 |
유형 | 인물 |
지역 | 한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선조~현종 |
집필자 | 정주영 |
봉작 | 정정옹주(貞正翁主) |
출신 | 왕족 |
성별 | 여자 |
출생 | 1595년(선조 28) |
사망 | 1666년(현종 7) |
본관 | 전주(全州) |
주거지 | 서울 |
묘소소재지 | 경기도 안산시 부곡동 산50-40 |
증조부 | 중종(中宗) |
조부 |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 |
부 | 선조(宣祖) |
모_외조 | 홍정빈(洪貞嬪) |
형제 | (동생)경창군(慶昌君) |
자녀 | (양자)유명전(柳命全)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정정옹주(貞正翁主)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선조실록』 39년 4월 10일, 『광해군일기』 11년 8월 17일 |
총론
[1595년(선조 28)~1666년(현종 7) = 72세]. 조선의 제 14대 임금인 선조(宣祖)의 딸로 옹주.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거주지는 서울이다. 어머니는 남양 홍씨(南陽洪氏)홍여겸(洪汝謙)의 딸인 홍정빈(洪貞嬪)이다. 친동생은 경창군(慶昌君)이다. 부마는 진주 유씨(晋州柳氏)진안위(晋安尉)유적(柳頔)이다. 광해군(光海君)과 정원군(定遠君)의 이복동생이자, 영창대군(永昌大君)의 이복누이이기도 하다.
출생과 혼인생활
<임진왜란(壬辰倭亂)>이 한창이던 1595년(선조 28) 정정옹주(貞正翁主)는 선조와 홍정빈 사이의 1남 1녀 가운데 장녀로 황해도 해주의 행궁에서 태어났다. 1604년(선조 37) 옹주는 10세로 정정옹주에 봉해졌으며, 1606년(선조 39) 홍문관(弘文館)교리(校理)를 지낸 유시행(柳時行)의 아들인 유적이 부마로 간택되었고, 유적은 진안위에 봉작되었다. 그러나 정정옹주와 유적은 혼인을 앞두고 유적의 아버지 유시행이 세상을 떠나자 결혼을 미루어야했다.(『선조실록』 39년 4월 10일) 그리고 1608년(선조 41) 유시행의 삼년상이 끝내자, 이번에는 선조가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선조의 삼년상이 끝난 1610년(광해군 2)에 혼인을 하게 되었다.
이후 1614년(광해군 6) 이복동생인 영창대군이 강화도에서 죽음을 맞고, 1618년(광해군 10) 선조의 계비(繼妃)인 인목대비(仁穆大妃)가 서궁(西宮)에 유폐되자 정정옹주는 근심과 분노로 식음을 전폐하며 철마다 인목대비에게 문후를 올렸다.[『성호전집(星湖全集)』 권58 「진안위유공신도비명병서(晉安尉柳公神道碑銘幷序)」 이하 「유적비명」으로 약칭] 부마인 유적도 이전부터 인목대비를 폐하라는 폐모론(廢母論)에 반대하였으므로,(『광해군일기』 11년 8월 17일) 조정 안팎에서 그를 유배 보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후 정정옹주는 조정의 알현과 연회 참석을 중지하고 부마 유적의 뒷바라지에 전념하였다. 그러나 1619년(광해군 11) 부마 유적이 25세라는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자 정정옹주는 부마를 따라가고자 하였으나, 어머니 홍정빈이 곁에서 떠나지 않고 정정옹주를 지켰다.[「유적비명」]
한편 정정옹주는 광해군(光海君) 대에 혼인을 하는 바람에 다른 옹주들의 비에 그 혜택이 적었는데, <인조반정(仁祖反正)> 이후 인조(仁祖)가 살림살이를 많이 도와주었다.[「유적비명」] 정정옹주는 72세가 되던 1666년(현종 7) 서울 집에서 세상을 떠났다. 이때 현종(顯宗)은 정사를 폐하고 장례 비용을 후사하였으며, 남편 유적의 묘와 합장하도록 하였다.
성품과 일화
화락하고 명민하여 일을 처리하는 것이 종종 이치를 아는 군자들도 미치지 못하는 바가 있었다. 궁궐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나 세상 물정을 잘 알았고 여자들이 익혀야 할 자질구레한 일까지도 어느 것 하나 훌륭히 갖추지 않은 것이 없었다. 성격이 검소하여 화려한 치장을 하지 않았으며 조상의 제삿날이 되면 반드시 손수 제수를 장만하고 경건하게 제사를 지내 새벽녘까지 잠을 자지 않았으므로 종족들이 흐뭇한 마음으로 탄복하였다.[「유적비명」]
한 번은 거처하던 집의 담장이 무너져 수리하려고 하자, 어떤 사람이 그 일은 이웃집과 분담해서 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옹주는 “내가 우리 집 담장을 수리하는 것인데 어찌 다른 사람들을 번거롭게 하겠는가. 더구나 이웃집은 나보다도 더 가난한 처지에 놓여 있으니 더더욱 안 될 일이다” 하였다. 같은 마을에 사는 이 정승(李政丞)이 이 말을 듣고는 “이것이 비록 사소한 일이기는 하지만 또한 옹주의 어진 성품을 엿볼 수 있다” 하였다. 부마 유적의 동생 유영(柳潁)이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후 어린 아들들이 가난하게 지내자 자신이 낳은 자식처럼 돌보아 주었다. 하루는 임금이 사사로운 일로 안부를 묻자 옹주가 대답하기를 “늙은 몸이 의식을 걱정할 정도는 아닙니다만, 애비 없는 조카들 가운데 기이한 질병에 걸린 아이가 있는데도 가난하여 치료를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였다. 이에 임금이 감동하여 내의원으로 하여금 약을 보내 주라고 명하였다.[「유적비명」]
묘소 및 후손
정정옹주와 부마 유적의 묘소는 경기도 안산시 부곡동 산50-40에 있으며, 1991년 11월 2일 안산시의 향토유적 제 14호로 지정되었다.
정정옹주와 유적의 사이에는 자녀가 없어 부마 유적의 동생 유영의 1남인 유명전(柳命全)을 계후로 삼았다.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정조실록(正祖實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선원계보기략(璿源系譜記略)』
- 『성호전집(星湖全集)』
- 『홍재전서(弘齋全書)』
- 지두환, 『선조대왕과 친인척』, 역사문화, 2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