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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총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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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와 후손'''==
 
=='''묘소와 후손'''==
  
묘소는 충청도 청주(淸州) 남쪽 마암리(馬岩里)의 선영에 있고, 송시열이 지은 묘표(墓表)가 남아 있다. 부인 이씨(李氏)는 이의(李誼)의 딸인데, 자녀는 딸만 6명이 있고 아들이 없어서 송유석(宋*錫)을 양자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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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는 충청도 청주(淸州) 남쪽 마암리(馬岩里)의 선영에 있고, 송시열이 지은 묘표(墓表)가 남아 있다. 부인 이씨(李氏)는 이의(李誼)의 딸인데, 자녀는 딸만 6명이 있고 아들이 없어서 송유석(宋*錫)을 양자로 삼았다.
  
 
=='''관력, 행적'''==
 
=='''관력, 행적'''==

2018년 1월 9일 (화) 22:46 기준 최신판




총론

[1621년(광해군13)∼1674년(현종15) = 54세]. 조선 후기 광해군~현종 때의 유일. 자는 성백(誠伯), 호는 문도재(問道齋)이다. 본관은 은진(恩津)이고, 주거지는 충청도 회덕(懷德)이다. 아버지는 송시염(宋時琰)이고 어머니는 정흔(鄭昕)의 딸이다. 평사(評事)송방조(宋邦祚)의 손자이고, 송시열(宋時烈)의 5촌 조카이다. 송시열과 송준길(宋浚吉)의 문인이다.

은거 생활

송시염이 두 번째 혼인(再娶)을 하면서, 그의 아들 송기후를 4촌 동생 송시열에게 맡겼는데, 마침 아들이 없던 송시열은 그를 맡아 자식처럼 키우면서 글을 가르쳤다. 그 뒤에는 송준길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학문과 덕행은 뛰어났으나 과거에는 급제하지 못하였다. 과거를 포기하는 대신 학문에만 전념하여, 효종과 현종 때 기호지방을 대표하는 유일(遺逸)로서 천거되었다.

1659년(효종10) 삼사(三司)자의(諮議)에 임명되었고, 1669년(현종10) 사헌부 지평(持平)에 임명되었으며, 1673년(현종14) 사헌부 장령(掌令)으로 승진하였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았다. 그는 송시열과 송준길의 노론(老論) 학통을 계승하여, 향촌에서 자제를 교육하는 데에 힘을 기울여서 많은 제자들을 배출하였다. 그는 평생 한 번도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고향 회덕에 머물면서 시종 ‘산림처사(山林處士)’로서 지조를 지켰다. 젊어서부터 병을 자주 앓았는데, 1674년(숙종즉위) 10월 23일 별다른 병이 없다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으니, 나이가 54세였다. 문인들이 묘표에 ‘문도선생(問道先生)’이라고 썼다.

성품과 일화

나이 12세에 송시열에게 『소학(小學)』을 배웠는데, 단정히 앉아서 독서하기를 그치지 않자, 송준길이 기특하게 여겨 불러서 먹을 것도 주고 또 글을 부지런히 가르쳤다. 송시열과 송준길의 문하생들이 매우 많았지만, 그는 특별히 사랑을 받았다. 사서(四書)를 배워 그 취지를 터득하였고, 『주자가례(朱子家禮)』 · 『심경(心經)』 · 『근사록(近思錄)』에는 정통하였다. 『시전(詩傳)』 · 『서전(書傳)』 · 『주역(周易)』 · 『예기(禮記)』를 공부하면서, 사물의 이치를 궁구하여 큰 경지에 이르기를 결심하고, “위기지학(爲己之學)은 이를 실천하는 데 있다.” 하였다. 처음에 윤휴(尹鑴)와 더불어 서로 친하게 지내면서 윤휴가 주해(註解)한 『중용(中庸)』을 읽어보고 기뻐하였다. 그러나 송시열이 “윤휴가 어떠한 인물이기에 감히 ‘주자 장구(朱子章句)’를 비난하고 스스로 새로운 학설을 내세운단 말이냐?” 라고 책망하니, 윤휴를 멀리하고 다시 만나지 않았다.

묘소와 후손

묘소는 충청도 청주(淸州) 남쪽 마암리(馬岩里)의 선영에 있고, 송시열이 지은 묘표(墓表)가 남아 있다. 부인 이씨(李氏)는 이의(李誼)의 딸인데, 자녀는 딸만 6명이 있고 아들이 없어서 송유석(宋*錫)을 양자로 삼았다.

관력, 행적

참고문헌

  • 『효종실록(孝宗實錄)』
  • 『현종실록(顯宗實錄)』
  • 『현종개수실록(顯宗改修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보감(國朝寶鑑)』
  • 『송자대전(宋子大典)』
  • 『백호전서(白湖全書)』
  • 『신독재전서(愼獨齋全書)』
  • 『노서유고(魯西遺稿)』
  • 『노주집(老洲集)』
  • 『동춘당집(同春堂集)』
  • 『연경재전집(硏經齋全集)』
  • 『일암유고(一庵遺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