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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소기(의장)]] |
− | | + | *[[소기(중국)]] |
− | {{물품도구|대표표제=소기|한글표제=소기|한자표제=小旗|대역어=|상위어=|하위어=|동의어=|관련어=|분야=왕실/왕실의례/군례|유형=물품·도구|지역=대한민국|시대=조선|왕대=|집필자=김지영|용도=|재질=|관련의례=|실록사전URL=http://encysillok.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00018307|실록연계=[http://sillok.history.go.kr/id/kaa_10302019_001 『태조실록』 3년 2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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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 명나라 때에 군인 열 명을 지휘하고 통솔하던 하급 군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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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개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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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 명나라의 군제인 위소제에서는 군인 10명에 소기(小旗) 하나를 세우고, 군인 50명에 총기(摠旗) 하나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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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원 및 변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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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 명나라에서는 태조 홍무제(洪武帝) 즉위 초에 모신(謀臣) 유기(劉基)의 건의에 따라 위소제를 군제로 채택하였다. 위소제에서 군대 편성 최소단위는 100호소(百戶所)로 총기(總旗) 2명, 소기(小旗) 10명, 병사 100명으로 이루어지며, 소기는 병사 10명을 거느렸다. 5,000호소로 1위(衛)를 편성하여, 1위의 총인원수는 5,600명이었다. 『태조실록』에 “요동도사(遼東都司)에서 온 자문(咨文)에 의거하여, 사람을 보내어 소기(小旗) 이한니(李閑你) 등을 처자(妻子)까지 합쳐 23명을 잡아서 요동도사에 보냈다([http://sillok.history.go.kr/id/kaa_10302019_001 『태조실록』 3년 2월 19일]).”라는 기록이 나오는 등 조선초기 『조선왕조실록』에 소기 직급을 가진 무관이 다수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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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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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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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조부묘도감의궤(仁祖祔廟都監儀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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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종왕세자책례도감의궤(景宗王世子冊禮都監儀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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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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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html><script>function reload() {window.location.reload();} </script><input type="button" value="Graph" onclick="reload();"><iframe width="100%" height="670px" src="http://encysilloknetwork.aks.ac.kr/Content/index?id=na00018307" frameborder="0" allowfullscreen></iframe></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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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분류:왕실]][[분류:왕실의례]][[분류:군례]][[분류:물품·도구]][[분류:대한민국]][[분류: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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