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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카락을 한데 모아 정수리에서 묶어 높이 치켜세운 머리 형태.
 
머리카락을 한데 모아 정수리에서 묶어 높이 치켜세운 머리 형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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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망'''==
 
=='''관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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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9일 (토) 20:59 기준 최신판



머리카락을 한데 모아 정수리에서 묶어 높이 치켜세운 머리 형태.

내용

고계(高髻)는 머리카락을 정수리에서 묶어 높이 치켜세우는 형태로, 머리의 크기와 부피가 확대된 형태의 머리 모양이다. 고구려 고분 벽화 중 안악 3호분 부인상에서 고계의 형태를 볼 수 있다. 『후한서(後漢書)』「마요전(馬廖傳)」에서 “성중에서 높은 상투를 좋아하니, 지방에서도 한 자씩 높아졌다”고 하였으며, 백거이(白居易)의 진사 책문(進士策問)에서는 “광수(廣袖) 고계의 노래가 들리면 그 풍속이 사치하고 방탕함을 알 수 있다”고 하였다. 즉 고계는 사치 풍조를 비유한 말로서 조선시대에 사용되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1509년(중종 4) “세조혜장대왕(世祖惠莊大王)께서 서교(西敎)를 숭상하시기 시작하여 중외(中外)가 그 바람을 따르게 되어 장차 고계광수(高髻廣袖)보다도 심해질 폐단이 있다”는 기록이 있으며(『중종실록』 4년 8월 23일), 1635년(인조 13)에도 부응교(副應敎)심지원(沈之源) 등이 고계광수의 사치스러운 풍속을 본받지 않도록 하라는 차자(箚子)를 올렸다(『인조실록』 13년 8월 3일).

용례

司憲府大司憲李誼等上疏曰 貧者不給 無以爲禮 婚姻愆期 職競由此 上好下甚 高髻廣袖之語 蓋以此也(『성종실록』 25년 10월 28일).

참고문헌

  • 임린, 『한국여인의 전통머리모양』, 민속원,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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