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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권(생몰미상)]]
{{인명사전|대표표제=박권|한글표제=박권|한자표제=朴權|이칭=|대역어=|상위어=|하위어=|동의어=|관련어=|분야=정치·행정가/관료/문신|유형=인물|지역=한국|시대=조선|왕대=성종~연산군|집필자=박은화|자= 이경(而經) |호= 고광(孤狂) |봉작=|시호=|출신=양반|성별=남성|출생=|사망=|본관=함양(咸陽)|주거지=|묘소소재지= 전라도 영암(靈巖) 서면(西面) 구림리(鳩林里) |증조부=|조부=|부= 박성건(朴成乾) |모_외조=|형제=|처_장인=|자녀=|유명자손=|저술문집=|작품=|실록사전URL=http://encysillok.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10000076|실록연계=}}
 
 
 
=='''총론'''==
 
 
 
생몰 미상. 조선 전기 성종(成宗)~연산군(燕山君) 때에 활동하던 문신. 자는 이경(而經), 호는 고광(孤狂)이다. 본관은 함양(咸陽)인데, 아버지는 [[전적(典籍)]]박성건(朴成乾)이다.
 
 
 
=='''무오사화의 피화'''==
 
 
 
1492년(성종23) 식년(式年)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거쳐 1497년(연산군3) [[사간원(司諫院)]][[정언(正言)]]이 되었다. 1498년(연산군4) 7월 [[김일손(金馹孫)]]의 [[사초(史草)]]에 실린 [[김종직(金宗直)]]의 「[[조의제문(弔義帝文)]]」에 대해 연산군(燕山君)이 의논하라고 명령하였을 때, 정언박권(朴權) 등이 의논하기를, “김종직의 「조의제문」은 말이 많이 부도(不道)하므로, 그 죄가 목을 베어도 부족합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이미 죽었으니, 작호(爵號)를 추탈하고 자손을 폐고(廢錮)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였다. 그러나, 연산군은 “김종직의 [[대역(大逆)]] 사실이 이미 드러났는데도 이들이 논의를 이렇게 미지끈 하니, 이것은 그를 비호하려는 것이다.” 하고, 박권 등 [[대간(臺諫)]]의 관원들을 잡아다가 형장(刑杖)하여 심문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연산군은 죽은 김종직의 관을 파내어 참시(斬屍)하였다. 1498년 무오사화(戊午士禍)이 일어나자, 박권은 함길도 길성(吉城)으로 유배되었다.
 
 
 
=='''갑자사화의 피화'''==
 
 
 
1504년(연산군10) 연산군의 어머니 윤씨(尹氏: 제헌왕후齊獻王后)를 [[폐비(廢妃)]]한 문제 때문에 [[갑자사화(甲子士禍)]]가 일어났을 때 박권은 일찍이 다른 죄로 장 1백 대를 맞고 전라도 해남(海南)에 유배되어 종살이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의금부(義禁府)]]에서 박권이 일찍이 ‘[[체아직(遞兒職)]]을 [[내시부(內侍府)]]에 옮기는 것이 옳지 않다.’고 논계한 죄목을 써서 아뢰자, 연산군이 박권을 잡아오게 하였다. 1505년(연산군11) 박권에게 다시 장 1백 대의 형신(刑訊)을 더하고 다시 유배지로 돌려보냈다. 그 후에 그의 행적을 알 수 없는데, 전라도 유배지에서 풀려나지 못하고 죽은 것 같다.
 
 
 
=='''묘소와 제향'''==
 
 
 
묘소는 전라도 영암(靈巖) 서면(西面) 구림리(鳩林里)에 있다.  전라도 영암에 있는 죽정서원(竹亭書院)에 제향되었다.
 
 
 
=='''관력, 행적'''==
 
 
 
=='''참고문헌'''==     
 
*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국조방목(國朝榜目)』           
 
 
 
[[분류:정치·행정가]][[분류:관료]][[분류:문신]][[분류:인물]][[분류:한국]][[분류:조선]][[분류:성종~연산군]]
 

2018년 1월 24일 (수) 22:14 기준 최신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