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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념용어|대표표제=감로사|한글표제=감로사|한자표제=甘露寺|대역어=|상위어=교종(敎宗), 삼십육사(三十六寺)|하위어=|동의어=|관련어=이자연(李子淵), 내수사(內需司), 선교양종(禪敎兩宗), 원경왕후(元敬王后), 송시열(宋時烈)|분야=문화/종교/불교|유형=개념용어|지역=경기도 개풍|시대=고려~조선|왕대=|집필자=김용태|실록사전URL=http://encysillok.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00014356|실록연계=[http://sillok.history.go.kr/id/kca_10603027_001 『태종실록』 6년 3월 27일], [http://sillok.history.go.kr/id/kca_10712002_002 『태종실록』 7년 12월 2일], [http://sillok.history.go.kr/id/kda_10102022_005 『세종실록』 1년 2월 22일], [http://sillok.history.go.kr/id/kda_10604005_002 『세종실록』 6년 4월 5일], [http://sillok.history.go.kr/id/kda_12502013_001 『세종실록』 25년 2월 13일], [http://sillok.history.go.kr/id/ksa_14312010_003 『숙종실록』 43년 12월 10일], [http://sillok.history.go.kr/id/ksa_14203003_003 『숙종실록』 42년 3월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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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념용어|대표표제=감로사|한글표제=감로사|한자표제=甘露寺|대역어=|상위어=자복사(資福寺)|하위어=|동의어=|관련어=해안(海安), 원감국사(圓鑑國師), 충지(沖止), 자복사찰(資福寺刹), 자은종(慈恩宗), 진남루석주기(鎭南樓石柱記), 감로사지(甘露寺址)|분야=문화/종교/불교|유형=개념용어|지역=경상남도 김해시 상동면|시대=고려~현대|왕대=|집필자=윤기엽|실록사전URL=http://encysillok.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00014414|실록연계=[http://sillok.history.go.kr/id/kca_10712002_002 『태종실록』 7년 12월 2일], [http://sillok.history.go.kr/id/kia_10507013_003 『성종실록』 5년 7월 13일]}}
  
세종대 국가에서 공인한 36사(寺) 가운데 하나로, 경기도 개풍군 오봉봉 아래에 위치한 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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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대 88개 자복사 가운데 하나로, 경상남도 김해시신어산에 있던 절.
  
 
=='''개설'''==
 
=='''개설'''==
  
감로사(甘露寺)는 경기도 개풍군 중서면 오봉봉(五鳳峰) 아래에 위치한 사찰로 11세기에 창건된 고려시대 개경의 유력한 사찰이었다. 조선에 들어서도 세종대에 설립된 선·교 양종 가운데 교종 18개 사찰에 들어갔다. 원경왕후의 친정인 여흥민씨 가문에서 지원한 사찰이기도 했으며, 조선전기에 왕실 불교와 밀접한 관련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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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로사(甘露寺)는 경상남도 김해시에 있었던 절로, 1237년(고려 고종 24)에 해안(海安)이 창건하였다고 하는데, 이곳에 있던 불상의 연대가 통일신라말기인 것으로 보아 신라시대부터 있던 절을 이때 중창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원감 국사 충지(沖止)가 주지로 부임하면서 크게 발전하였다. 조선 태종 때 자은종의 자복사찰(資福寺刹)로 지정되었고 이후 18세기까지 존속하였다. 현재 감로사지(甘露寺址)는 김해시 상동면 감로리에 있는데, 사지에는 부도 2기만 남겨져 있다. 감로사에 있던 불상은 용화사에, 석탑은 동아대학교 박물관으로 이전하여 보존되고 있다.
  
=='''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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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및 변천'''==
  
고려의 유력 문벌귀족이자 문종의 장인인 이자연(李子淵)이 창건한 사찰이다. 이자연은 송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윤주(潤州) 감로사의 절경을 보고 돌아와 이 절을 세웠다고 한다. 감로사는 고려 왕실의 원찰로서, 이자연의 딸인 인예왕후가 이 절에서 기도를 하여 숙종 등을 낳았다고 한다. 김부식(金富軾), 이규보(李奎報), 이색(李穡), 권근(權近) 등의 유명 문사들도 자주 찾아 시문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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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조선전기
  
=='''변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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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들어와 1407년(태종 7) 12월, 김해(金海) 감로사(甘露寺)는 자은종의 자복사찰로 지정되었다([http://sillok.history.go.kr/id/kca_10712002_002 『태종실록』 7년 12월 2일]). 자복사찰은 나라와 고을의 번영을 기원하기 위해 만들거나 또는 지정하는 사찰이었다. 당시 조선시대의 불교 종파는 이전 11개(혹은 12개)에서 [[조계종(曹溪宗)]], [[천태종(天台宗)]], [[화엄종(華嚴宗)]], [[자은종(慈恩宗)]], [[중신종(中神宗)]], [[총남종(摠南宗)]], [[시흥종(始興宗)]] 등 7개 종파로 정리되었는데, 김해 감로사는 자은종에 소속된 자복사찰이었다. 고려 고종 때 창건되어 원 간섭기에 융성했던 감로사가 조선초에도 지방의 명찰(名刹)이었음을 알 수 있다. 본래 조계종 소속이었던 감로사가 자은종으로 바뀐 점도 주목된다. 자복사찰로 지정된 이후 상당히 윤택한 사찰로 유지되었음은 『성종실록(成宗實錄)』에서 "감로사의 노비가 수백 명에 이른다."([http://sillok.history.go.kr/id/kia_10507013_003 『성종실록』 5년 7월 13일])고 한 기사를 통해서 짐작할 수 있다.
  
태종대인 1406년(태종 6)에는 국가 지정 11개 종파 242개를 제외한 전국 사찰의 토지와 노비가 속공되었다([http://sillok.history.go.kr/id/kca_10603027_001 『태종실록』 6년 3월 27일]). 다음 해에는 불교 종파가 조계종, 천태종, 화엄종, 자은종, 시흥종, 중신종, 총남종의 7개로 축소 통합되었고, 이때 242개 사찰 가운데 기존의 읍내 [[자복사(資福寺)]] 88개가 명산의 대찰로 대체되었다([http://sillok.history.go.kr/id/kca_10712002_002 『태종실록』 7년 12월 2일]). 자복사는 고려시대 각 지역의 중심지에 위치했던 비보사(裨補寺)로서, 조선의 지역 질서 개편과 연동하여 고려의 유산을 혁파하고 산간에 있는 명찰로 대체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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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조선후기
  
당시 자은종 소속 36개 사찰 가운데 감로사를 비롯해 [[관음사(觀音寺)]]>, [[성주사(聖住寺)]], 성불사(成佛寺), 신이사(神異寺) 등 17개 사찰이 새로 편입되었다. 하지만 여기에 새로 포함된 감로사는 경상도 김해에 있던 절로, 개성에 위치한 감로사와는 다른 사찰이다. 『세종실록』 「지리지」의 개성(開城) 항목을 보면, 세종대 교종에 속하게 된 감로사는 개성 벽란도 동쪽에 있으며 강물이 내려다보이는 절경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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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로사의 「진남루석주기(鎭南樓石柱記)」에는 1731년(영조 7)에 24개의 석주(石柱)를 세워 감로사에 진남루(鎭南樓)를 세웠다는 기록이 있다. 이것으로 볼 때 감로사의 정확한 폐사 시기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18세기까지는 존립한 사찰이었음은 분명하다. 부속 암자로 남암(南庵), 중암(中庵), 서암(西庵), 도솔암(兜率庵), 백련암(白蓮庵), 석영암(石永庵) 등이 있었다고 전하고 있어서 그 규모도 적지 않은 사찰이었음을 짐작하게 해준다. 현재는 이들 암자 역시 모두 남아 있지 않다.
  
세종대에는 모후 원경왕후의 가문에서 시주했던 감로사 노비 100명을 경기도 고양의 대자암(大慈菴)으로 옮기라는 명이 내려졌고, 이 노비들은 이후 [[숭효사(崇孝寺)]]와 태종의 이궁인 [[수강궁(壽康宮)]]으로 재차 이속되었다([http://sillok.history.go.kr/id/kda_10102022_005 『세종실록』 1년 2월 22일]). 1424년(세종 6) 세종은 기존의 7개 종단을 선·교 양종으로 나누고 각각 18개씩 36개 사찰만 공인하였는데, 이때 감로사는 교종 18사 중 하나로 지정되었다. 감로사는 원래 가지고 있던 40결에 160결의 토지가 추가로 지급되어 총 200결을 보유하게 되었고 거주 승려는 100명으로 정해졌다([http://sillok.history.go.kr/id/kda_10604005_002 『세종실록』 6년 4월 5일]). 이후 세종은 감로사를 비롯해 지장사(地蕆寺) 등 4개 사찰의 노비는 외가인 민씨 가문에서 예로부터 시주한 것으로서 태종대에 사원노비를 혁파할 때도 모두 본궁에 소속시키게 하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da_12502013_001 『세종실록』 25년 2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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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현대
  
숙종대에는 송시열(宋時烈)과 윤증(尹拯)이 감로사에서 만나거나 [[박세채(朴世采)]] 등이 회동을 한 일이 기록되고 있어([http://sillok.history.go.kr/id/ksa_14312010_003 『숙종실록』 43년 12월 10일]) ([http://sillok.history.go.kr/id/ksa_14203003_003 『숙종실록』 42년 3월 3일]), 조선후기에도 존속하였음을 알 수 있지만 구체적 실상은 알려져 있지 않고 현재는 폐사된 상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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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로사지에는 3층석탑의 기단부와 지붕돌, 연화대석(蓮花臺石), 귀부(龜趺) 등이 남아 있었으나 1975년 부산 동아대학교 박물관으로 옮겨 보존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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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폐사된 감로사의 절터에 있었던 석조여래좌상(石造如來坐像)은 1947년 인근 강변에 있던 것을 양산시 물금읍 용화사(龍華寺)에 옮겨 봉안하였다. 이것이 용화사석조여래좌상(龍華寺石造如來坐像)으로, 1968년 12월 보물 제491호로 지정되었다. 불상 높이는 1.25m로 통일신라말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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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감로사지에는 석종형 사리부도 2기만이 남아 있으나 누구의 것인지는 알지 못한다.
  
 
=='''참고문헌'''==       
 
=='''참고문헌'''==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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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금석총람(朝鮮金石總覽)』     
 
*권상로, 『한국사찰전서』, 동국대학교출판부, 1979.       
 
*권상로, 『한국사찰전서』, 동국대학교출판부, 1979.       
*이능화, 『조선불교통사』, 신문관, 1918.     
 
*탁효정, 「조선시대 왕실원당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12.     
 
*高橋亨, 『李朝佛敎』, 寶文館, 1929.     
 
  
 
=='''관계망'''==
 
=='''관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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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문화]][[분류:종교]][[분류:불교]][[분류:개념용어]][[분류:경상남도 김해시 상동면]][[분류:고려~현대]]

2017년 12월 10일 (일) 02:19 판



태종대 88개 자복사 가운데 하나로, 경상남도 김해시신어산에 있던 절.

개설

감로사(甘露寺)는 경상남도 김해시에 있었던 절로, 1237년(고려 고종 24)에 해안(海安)이 창건하였다고 하는데, 이곳에 있던 불상의 연대가 통일신라말기인 것으로 보아 신라시대부터 있던 절을 이때 중창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원감 국사 충지(沖止)가 주지로 부임하면서 크게 발전하였다. 조선 태종 때 자은종의 자복사찰(資福寺刹)로 지정되었고 이후 18세기까지 존속하였다. 현재 감로사지(甘露寺址)는 김해시 상동면 감로리에 있는데, 사지에는 부도 2기만 남겨져 있다. 감로사에 있던 불상은 용화사에, 석탑은 동아대학교 박물관으로 이전하여 보존되고 있다.

내용 및 변천

(1) 조선전기

조선시대에 들어와 1407년(태종 7) 12월, 김해(金海) 감로사(甘露寺)는 자은종의 자복사찰로 지정되었다(『태종실록』 7년 12월 2일). 자복사찰은 나라와 고을의 번영을 기원하기 위해 만들거나 또는 지정하는 사찰이었다. 당시 조선시대의 불교 종파는 이전 11개(혹은 12개)에서 조계종(曹溪宗), 천태종(天台宗), 화엄종(華嚴宗), 자은종(慈恩宗), 중신종(中神宗), 총남종(摠南宗), 시흥종(始興宗) 등 7개 종파로 정리되었는데, 김해 감로사는 자은종에 소속된 자복사찰이었다. 고려 고종 때 창건되어 원 간섭기에 융성했던 감로사가 조선초에도 지방의 명찰(名刹)이었음을 알 수 있다. 본래 조계종 소속이었던 감로사가 자은종으로 바뀐 점도 주목된다. 자복사찰로 지정된 이후 상당히 윤택한 사찰로 유지되었음은 『성종실록(成宗實錄)』에서 "감로사의 노비가 수백 명에 이른다."(『성종실록』 5년 7월 13일)고 한 기사를 통해서 짐작할 수 있다.

(2) 조선후기

감로사의 「진남루석주기(鎭南樓石柱記)」에는 1731년(영조 7)에 24개의 석주(石柱)를 세워 감로사에 진남루(鎭南樓)를 세웠다는 기록이 있다. 이것으로 볼 때 감로사의 정확한 폐사 시기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18세기까지는 존립한 사찰이었음은 분명하다. 부속 암자로 남암(南庵), 중암(中庵), 서암(西庵), 도솔암(兜率庵), 백련암(白蓮庵), 석영암(石永庵) 등이 있었다고 전하고 있어서 그 규모도 적지 않은 사찰이었음을 짐작하게 해준다. 현재는 이들 암자 역시 모두 남아 있지 않다.

(3) 현대

감로사지에는 3층석탑의 기단부와 지붕돌, 연화대석(蓮花臺石), 귀부(龜趺) 등이 남아 있었으나 1975년 부산 동아대학교 박물관으로 옮겨 보존되고 있다.

본래 폐사된 감로사의 절터에 있었던 석조여래좌상(石造如來坐像)은 1947년 인근 강변에 있던 것을 양산시 물금읍 용화사(龍華寺)에 옮겨 봉안하였다. 이것이 용화사석조여래좌상(龍華寺石造如來坐像)으로, 1968년 12월 보물 제491호로 지정되었다. 불상 높이는 1.25m로 통일신라말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현재 감로사지에는 석종형 사리부도 2기만이 남아 있으나 누구의 것인지는 알지 못한다.

참고문헌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조선금석총람(朝鮮金石總覽)』
  • 권상로, 『한국사찰전서』, 동국대학교출판부, 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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