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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서봉사(담양)]] |
− | | + | *[[서봉사(용인)]] |
− | {{개념용어|대표표제=서봉사|한글표제=서봉사|한자표제=瑞峰寺|대역어=|상위어=교종(敎宗), 총남종(摠南宗), 삼십육사(三十六寺)|하위어=|동의어=|관련어=자복사(資福寺), 정양사(正陽寺)|분야=문화/종교/불교|유형=개념용어|지역=전라남도 담양군|시대=조선전기|왕대=|집필자=김용태|실록사전URL=http://encysillok.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00014362|실록연계=[http://sillok.history.go.kr/id/kca_10603027_001 『태종실록』 6년 3월 27일], [http://sillok.history.go.kr/id/kca_10712002_002 『태종실록』 7년 12월 2일], [http://sillok.history.go.kr/id/kda_10604005_002 『세종실록』 6년 4월 5일], [http://sillok.history.go.kr/id/kda_10705012_003 『세종실록』 7년 5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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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종대 국가에서 공인한 36사(寺) 가운데 하나로, 전라남도 담양군에 위치한 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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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개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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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라남도 담양군 창평면에 위치한 서봉사(瑞峰寺)의 창건 및 연혁은 알려져 있지 않다. 조선 태종대에 242개 사찰을 공인할 때 새로 선정된 88개의 명찰 중 하나였고 총남종에 소속되었다. 세종대 선교양종 36개 사찰을 지정할 때 교종 18개사의 하나로 편입되었다가 몇 년 후 누락되고 금강산[[정양사(正陽寺)]]가 대신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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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변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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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이 개국한 후 태종대에 억불 정책이 가시화되었는데, 1406년(태종 6) 11개 종파의 242개 공인 사찰을 제외한 전국 사찰의 [[전민(田民)]]이 속공되었다. 당시 지정된 242개 사찰을 종파별로 보면, [[조계종(曹溪宗)]]과 [[총지종(摠持宗)]]을 합쳐서 70사, 천태종 계열인 [[소자종(疏字宗)]]과 [[법사종(法事宗)]]은 43사, [[화엄종(華嚴宗)]]과 [[도문종(道門宗)]]은 모두 43사, [[자은종(慈恩宗)]] 36사, [[중도종(中道宗)]]과 [[신인종(神印宗)]]은 합쳐서 30사, [[남산종(南山宗)]]과 [[시흥종(始興宗)]]은 각각 10개 사찰이었다([http://sillok.history.go.kr/id/kca_10603027_001 『태종실록』 6년 3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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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다음 해에는 242개 사찰을 정할 때 유서 깊은 대가람이 누락되고 이미 없어진 사찰에 주지가 임명되는 등의 문제가 있었다고 하여, 산수 경치가 좋은 사찰을 대신 선정하라는 조치가 내려졌다. 이에 명산의 대찰 88개를 새로 선정해 주로 읍내에 있는 고려 이래의 [[자복사(資福寺)]]를 대체하게 하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ca_10712002_002 『태종실록』 7년 12월 2일]). 자복사는 고려시대에 나라의 안녕과 복을 빌기 위해 각 지역의 중심지에 설치했던 비보사(裨補寺)로서, 위의 조치는 조선의 지역 질서 개편과 연동하여 고려의 유산을 혁파하고 산간에 있는 명찰로 대체한 것이다. 또한 11개 종파가 조계종, 천태종, 화엄종, 자은종, 시흥종, [[중신종(中神宗)]], [[총남종(摠南宗)]]의 7개로 축소 또는 통합되었다. 당시 창평 서봉사는 총남종 소속 사찰로서 새로 지정된 88개 사찰에 포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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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424년(세종 6) 세종은 기존의 7개 종단을 선교양종으로 나누고 각각 18개씩 36개 사찰만 공인하였는데, 이때 서봉사는 교종 18사 중 하나로 지정되었다. 서봉사는 교종 18사에 포함되었고 원래 보유 전지 60결에 더하여 90결이 추가로 지급되어 150결의 소유가 허용되었고 거주 승려는 70명으로 정해졌다. 같은 전라도의 전주[[경복사(景福寺)]]는 원속전 100결에 50결이 더해졌고 거주 승려는 70명으로 서봉사와 같은 규모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da_10604005_002 『세종실록』 6년 4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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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지만 몇 년 후 선종에 소속된 전라도 태인의 [[흥룡사(興龍寺)]]와 교종의 서봉사는 산수가 좋은 명찰이 아니라는 이유로 강원도금강산의 [[장안사(長安寺)]]와 정양사로 각각 대체되었고, 흥룡사와 서봉사의 전지를 모두 옮기게 하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da_10705012_003 『세종실록』 7년 5월 12일]). 이로써 서봉사는 국가가 공인한 36개 사찰에서 제외되었고 이후의 실상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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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현재 전라남도 담양군 창평면에 서봉사의 터만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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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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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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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권상로, 『한국사찰전서』, 동국대학교출판부, 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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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능화, 『조선불교통사』, 신문관, 1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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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高橋亨, 『李朝佛敎』, 寶文館, 1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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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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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html><script>function reload() {window.location.reload();} </script><input type="button" value="Graph" onclick="reload();"><iframe width="100%" height="670px" src="http://encysilloknetwork.aks.ac.kr/Content/index?id=na00014362" frameborder="0" allowfullscreen></iframe></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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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분류:문화]][[분류:종교]][[분류:불교]][[분류:개념용어]][[분류:전라남도 담양군]][[분류:조선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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