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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서학(西學)이라는 학문으로 시작한 조선의 천주교는 선교사가 없었기 때문에 교리적으로 상당히 취약하였다. 그리하여 몇 가지 교리의 의문을 해결하고 선교사 파견을 요청하기 위하여 1789년(정조 13)과 1790년(정조 14) 조선 천주교회에서는 두 차례에 걸쳐 [[윤유일(尹有一)]]을 북경(北京)으로 파견하였다. 이때 윤유일은 구베아(Gouvea) 주교로부터 서한을 받아 왔는데 여기에는 조상 제사 금지의 내용이 들어 있었다. 이를 수용하지 못한 많은 양반 신자들의 천주교 이탈이 이어졌으나, 윤지충은 천주교회의 뜻에 따라 신주를 불태우고 신주를 넣었던 빈 궤만 사당에 놓았다. | 한편 서학(西學)이라는 학문으로 시작한 조선의 천주교는 선교사가 없었기 때문에 교리적으로 상당히 취약하였다. 그리하여 몇 가지 교리의 의문을 해결하고 선교사 파견을 요청하기 위하여 1789년(정조 13)과 1790년(정조 14) 조선 천주교회에서는 두 차례에 걸쳐 [[윤유일(尹有一)]]을 북경(北京)으로 파견하였다. 이때 윤유일은 구베아(Gouvea) 주교로부터 서한을 받아 왔는데 여기에는 조상 제사 금지의 내용이 들어 있었다. 이를 수용하지 못한 많은 양반 신자들의 천주교 이탈이 이어졌으나, 윤지충은 천주교회의 뜻에 따라 신주를 불태우고 신주를 넣었던 빈 궤만 사당에 놓았다. |
2018년 1월 9일 (화) 22:57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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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윤지충 |
한글표제 | 윤지충 |
한자표제 | 尹持忠 |
분야 | 천주교도 |
유형 | 인물 |
지역 | 한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정조 |
집필자 | 정주영, 김가람 |
자 | 우용(禹用) |
출신 | 양반 |
성별 | 남자 |
출생 | 1759년(영조 35) |
사망 | 1791년(정조 15) |
본관 | 해남(海南) |
주거지 | 진산(珍山) |
증조부 | 윤두서(尹斗緖) |
조부 | 윤덕렬(尹德烈) |
부 | 윤경(尹憬) |
모_외조 | 안동 권씨(安東權氏) : 권기징(權沂徵)의 딸 |
형제 | (동생)윤지헌(尹持憲) |
처_장인 | 연안 이씨(延安李氏) : 이종연(李宗延)의 딸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윤지충(尹持忠)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정조실록』 15년 11월 7일, 『정조실록』 15년 10월 24일, 『정조실록』 15년 11월 7일, 『정조실록』 15년 10월 23일, 『정조실록』 15년 11월 7일, 『정조실록』 15년 11월 8일 |
목차
총론
[1759년(영조 35)~1791년(정조 15) = 33세]. 조선 후기 정조(正祖) 때의 천주교도. 자는 우용(禹用)이고, 세례명은 바오로이다. 본관은 해남(海南)이며, 거주지는 진산(珍山)이다. 아버지는 윤경(尹憬)이고, 어머니 안동 권씨(安東權氏)는 권기징(權沂徵)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윤덕렬(尹德烈)이며, 증조할아버지는 화가로 유명한 윤두서(尹斗緖)이다. 정약전(丁若銓)·정약용(丁若鏞) 형제의 어머니가 고모이기도 하다. <진산사건(珍山事件)> 당사자로서, <신해박해(辛亥迫害)> 때 처형당하며 조선의 첫 번째 천주교 순교자가 되었다.
정조 시대 활동
1783년(정조 7) 증광시(增廣試)에 급제한 윤지충(尹持忠)은 이듬해인 1784년(정조 8) 서울에 올라와 김범우(金範禹)로부터 『천주실의(天主實義)』와 『칠극(七克)』 등의 천주교 서적을 빌려 보았으나, 이때에는 천주교에 큰 관심을 갖지 못하였다.[『방목(榜目)』],(『정조실록』 15년 11월 7일) 그로부터 2년 후인 1786년(정조 10) 무렵 윤지충은 고종 사촌인 정약전에게 천주교 교리를 배우고, 1787년(정조 11)에는 이승훈(李承薰)으로부터 세례를 받으며 천주교에 깊이 빠져 들었다. 이에 집에 돌아온 후 어머니 안동 권씨와 동생 윤지헌(尹持憲), 외사촌 권상연(權尙然) 등 주위 사람들에게 천주교를 전파하기 시작하였다.
한편 서학(西學)이라는 학문으로 시작한 조선의 천주교는 선교사가 없었기 때문에 교리적으로 상당히 취약하였다. 그리하여 몇 가지 교리의 의문을 해결하고 선교사 파견을 요청하기 위하여 1789년(정조 13)과 1790년(정조 14) 조선 천주교회에서는 두 차례에 걸쳐 윤유일(尹有一)을 북경(北京)으로 파견하였다. 이때 윤유일은 구베아(Gouvea) 주교로부터 서한을 받아 왔는데 여기에는 조상 제사 금지의 내용이 들어 있었다. 이를 수용하지 못한 많은 양반 신자들의 천주교 이탈이 이어졌으나, 윤지충은 천주교회의 뜻에 따라 신주를 불태우고 신주를 넣었던 빈 궤만 사당에 놓았다.
그런 가운데 1791년(정조 15) 5월 어머니 안동 권씨가 세상을 떠났고, 윤지충과 권상연은 제사를 지내지 않기로 결정하였다.(『정조실록』 15년 10월 24일) 이 사건은 곧 부모의 시체를 버렸다는 소문으로 부풀려져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진산사건이다. 그리고 얼마 후 당시 가주서(假注書)로 있던 홍낙안(洪樂安) 또한 이 소문을 듣게 되었다.(『정조실록』 15년 11월 7일) 홍낙안은 곧 진산군수(珍山郡守)신사원(申史原)에게 편지를 보내 사건을 빨리 해결하지 않은 것을 힐책하고, 이어 좌의정채제공(蔡濟恭)에게도 편지를 보내 진산사건의 진상을 파헤칠 것을 요구하였다.(『정조실록』 15년 10월 23일) 결국 조정에서는 윤지충과 권상연을 조사하도록 하였고, 신문 과정에서 두 사람은 신주를 불태운 것과 천주교를 믿는 것은 인정하였으나 부모의 시체를 버리고 장례를 치르지 않았다는 소문에 대해서는 결백을 주장하였다.(『정조실록』 15년 11월 7일) 이에 조정에서는 『대명률(大明律)』에 따라 윤지충과 권상연의 흉악함과 패륜을 다루기로 결정하였고, 그해 11월 8일 두 사람은 전주에서 참수되었다. 그리고 이들의 죄와 연좌되어 진산군(珍山郡)은 5년 동안 현(縣)으로 강등되고, 진산군수(珍山郡守)신사원(申史源)도 유배형에 처해졌다.(『정조실록』 15년 11월 8일) 이어 천주교를 사학(邪學)으로 규정하며 권일신(權日身)과 이승훈 등의 천주교도들도 체포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조선의 첫 번째 천주교 박해인 신해박해이다.
한편 윤지충은 2014년 교황 프란치스코에 의해 복자로 시복되었다.
일화
윤지충이 세상을 떠난 후 조선 천주교회 신자들은 윤지충이 감옥에서 작성하였다고 알려진 공술기인 「죄인지충일기(罪人持忠日記)」를 필사하여 읽었을 뿐만 아니라, 윤지충과 권상연의 피로 젖었던 수건을 간직하였다.[『사학징의(邪學懲義)』] 이는 조선 천주교회의 첫 번째 순교자인 윤지충에 대한 공경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참고문헌
- 『정조실록(正祖實錄)』
- 『순조실록(純祖實錄)』
- 『방목(榜目)』
- 『일성록(日省錄)』
- 『눌암기략(訥菴記略)』
- 『벽위편(闢衛編)』
- 『다산시문집(茶山詩文集)』
- 『만가보(萬家譜)』
-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
- 『사학징의(邪學懲義)』
- 한국천주교회사 편, 『한국가톨릭대사전』9, 2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