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복전(興福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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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대에 지은 경복궁의 아미산 북쪽에 있는 침전.

개설

흥복전(興福殿)은 1867년(고종 4)경 조성되었다(『고종실록』 4년 8월 18일). 1876년 대화재로 내전의 주요 전각이 소실되자 왕은 창덕궁으로 이어하였으나 소실된 전각을 복구하지 않은 상태에서 다시 1885년 경복궁으로 환어하였다. 정침인 강녕전이 불타서 없는 상태였으므로 건물을 재건하기 전까지 만경전과 함께 강녕전을 대신하는 전각으로 이용하였다.

위치 및 용도

흥복전이 들어선 자리는 아미산 북쪽으로 임진왜란 이전에는 소규모의 정자 정도만 있었고 큰 전각은 없었다. 흥복전은 경복궁 중건 이후 두 차례의 내전 일곽 화재에서 피해를 입지 않았기 때문에 고종이 1885년 경복궁으로 환어한 후에 만경전과 함께 공식적인 행사와 왕의 정무를 위한 공간으로 사용되었다. 1890년에는 대왕대비 신정왕후가 이곳에서 승하하였다(『고종실록』 27년 4월 17일).

변천 및 현황

흥복전은 내전 일곽이 재건된 1890년 이후, 신정왕후가 이곳에서 승하한 다음부터는 기록이 없다. 1920년 창덕궁의 대조전과 희정당이 화재로 소실되자 조선 총독부에서 경복궁의 전각을 헐어 대조전 일곽을 재건하였다. 이때 흥복전도 헐렸으나 창덕궁의 어떤 건물로 지어졌는지는 알 수 없다.

형태

흥복전의 규모는 정면 9칸, 측면 4칸으로 전·후 툇간이 있으며 가운데 3칸은 대청이고 좌우로 온돌방이 두 칸씩 있다. 동·서쪽의 협간은 마루이고 동쪽의 누마루 뒤로는 침방이 4칸 덧붙여진 평면 구성을 하고 있다. 서쪽의 누마루는 만의루(萬宜樓)이다. 『궁궐지(宮闕誌)』에는 공포 형식이 초익공으로 되어 있어 이익공인 자경전보다 위계가 낮다. 흥복전은 남쪽에 아미산이 있어서 남행각이 없는 대신 내행각을 동·서·북쪽으로 갖추고 있고, 서쪽에 남북으로 길게 중행각과 외행각이 있으며 북쪽에는 동서로 긴 행각이 4겹으로 있다.

흥복전 서쪽 내담[內墻] 일각문은 유동문(攸同門), 동행각 동쪽 사이 담[間墻] 일각문은 유일문(維日門)이다. 북행각에는 광순문(光順門)·상화문(祥化門)·태지당(泰祉堂)·계형당(啓亨堂)이 있다. 북행각 동쪽 담장 일각문은 협인문(協寅門)이다.

서쪽의 중행각과 외행각은 서로 마주 보면서 흥복전 쪽으로는 등을 돌리고 있다. 서쪽 중행각 문은 숭희문(崇禧門)과 서안문(瑞安門)이다. 북쪽 행각은 중행각, 삼행각, 사행각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중행각에는 경소문(景昭門)·숭광문(崇廣門)이 있고, 삼행각에는 수후문(綏厚門), 사행각에는 일창문(日彰門)·광원당(廣元堂)·회광당(會光堂)이 있다. 북쪽 다경합과의 사이 담에는 일각문으로 융후문(隆厚門)과 수대문(綏大門)이 있고, 북쪽 담장에 있는 일각문은 무현문(茂顯門)·이혜문(貽惠門)·이신문(履信門)이다.

흥복전의 주 출입문은 솟을대문으로 수인문(壽仁門)이다. 서행각 문은 선의문(宣義門)·적경문(積慶門), 서행각 중문은 수다문(受多門), 중앙의 일각문은 개이문(介爾門), 창차비(窓差備)는 시오문(時五門)이다. 서북쪽에는 정면 5칸, 측면 2칸의 다경합(多慶閤)이 있다.

관련사건 및 일화

흥복전은 고종 전기에는 사용 기록이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흥복전의 사용 기록 중에는 1872년에 철종의 딸인 영혜옹주(永惠翁主)의 부마를 간택하는 장소로 흥복전을 정한 것이 있는데, 후보자들은 영추문을 통해 궁으로 들어와 흥복전에서 간택에 임하였다. 2개월간에 걸쳐 삼간택까지 하였으며 이때 간택된 부마가 금릉위(錦陵尉)박영효(朴泳孝)이다. 그러나 영혜옹주는 혼인 후 5개월을 넘기지 못한 채 병으로 숨을 거두었다.

1890년에는 대왕대비 신정왕후가 이곳에서 승하하였다. 신정왕후의 처소는 자경전이었는데 당시 자경전은 화재 후 복구공사가 막 끝난 직후였으므로 연로한 신정왕후는 흥복전에 거처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일성록(日省錄)』
  • 『궁궐지(宮闕誌)』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