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국(換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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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숙종의 주도하에 전격적으로 주도당과 견제당을 교체하여 새로운 정치적 구도를 만들었던 정국 변동.

개설

환국(換局) 개념은 시기나 주체, 대상 동인(動因)에 따라 다양하게 규정할 수 있다. 좁은 의미로는 숙종대에 발생했던 갑인환국(甲寅換局), 경신환국(庚申換局), 기사환국(己巳換局), 갑술환국(甲戌換局) 등 4번의 정국 변동만을 포함한다. 넓은 의미로는 1674년의 갑인환국부터 1727년 정미환국(丁未換局)까지 약 50여 년 동안 발생한 아홉 차례의 정국 변동을 포함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 1674년(숙종 즉위)에 복제(服制) 논쟁을 계기로 발생한 갑인환국, 복선군(福善君)과 허견(許堅)의 역모로 인해 야기된 1680년의 경신환국, 1689년에 원자(元子) 정호(定號) 문제를 둘러싸고 발생한 기사환국, 김춘택(金春澤)과 한중혁(韓重爀)의 모의로 인현왕후(仁顯王后)가 복위되는 갑술환국, 1710년 최석정(崔錫鼎)의 『예기유편(禮記類編)』 소각(燒却)을 계기로 이루어진 경인환국, 1716년 윤선거(尹宣擧) 문집 훼판(毁板) 사건으로 이루어진 병신처분, 1721(경종 1)~1722년 후일의 영조 연잉군(延礽君)의 왕세제(王世弟) 책봉 문제로 발생한 신임환국(辛壬換局), 1725년(영조 1) 정국이 노론 중심으로 교체되는 을사환국(乙巳換局), 1727년 신임의리(辛壬義理)를 주장한 노론 대신에 소론을 기용한 정미환국(丁未換局) 등을 들 수 있다.

내용 및 특징

숙종대 이후 붕당 간의 격렬한 대립과 일당(一黨) 전제화(專制化)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환국은 붕당 정치의 변질(變質) 또는 말폐(末弊)로 인식되었다. 하지만 환국을 조선후기의 사회적 변화에 따라 붕당의 정치적 안정이 깨지면서 나타난 현상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이러한 환국의 이해와 관련하여 몇 가지 쟁점들이 존재한다.

먼저 환국의 주체 문제이다. 붕당은 환국의 원동력이라고 볼 수 있다. 즉 환국의 계기가 복수의 붕당이 대립·공존하는 정치적 역학 구도를 바탕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환국의 구체적인 계기가 붕당 간의 관계에서만 제공된 것은 아니다. 왕, 훈척(勳戚) 등의 붕당 외적인 존재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특히 왕은 붕당 간의 역학 관계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요소로, 붕당의 정국 주도권은 왕권과의 관계를 전제로 한다. 붕당 간의 관계가 견제와 균형을 이루며 안정적이었던 붕당 정치기에, 왕은 정국 운영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어려웠고 붕당 간의 대립에 깊숙이 관여하지 않았다. 하지만 붕당들이 서로 대립할 때, 왕은 붕당 간의 균형을 깨고 정국을 전환시킬 수는 있었다. 즉 붕당 간의 역학 구도는 왕의 의지와 처분에 따라 급격하게 변동하기도 하였다.

두 번째, 환국과 왕권 강화와의 관련성이다. 현재까지의 연구성과에 따르면 환국이 반복되는 동안 왕의 역할은 ‘증대(增大)’되었으나 ‘강화(强化)’로까지는 이어지지 않는다고 이해되고 있다. 하지만 환국의 주체나 동인을 고려할 때, 환국은 왕권의 정통성과 안정성을 해치는 정치적 위협 요소를 제거하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숙종은 환국을 통해 왕권의 안정과 강화를 기대하였다. 특히 후반기에 이르면, 숙종은 ‘강화’된 왕권을 기반으로 하여, 공적(公的)인 영역뿐만 아니라 사적(私的)인 영역에서도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

세 번째로 환국의 대상(범위)을 어디까지로 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환국으로 교체되는 집단이 일차적으로는 붕당인 점을 고려할 때, 붕당은 환국의 주체이자 대상이라고 할 수 있다. 붕당의 내부는 학연·지연·혈연에 따라 다양한 층위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다양성은 환국 발생 후 정국 수습 과정에서 극명히 표출되어 정치 세력 간의 이합집산이 진행되기도 했다. 환국은 쟁점 사안에 따라 붕당의 전면적인 교체를 가져오기도 하고 실질적인 소수 권력 집단의 교체에 한정되기도 했다.

네 번째, 환국의 직접적인 동인은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기존에는 환국의 원인을 붕당 간의 사적인 원한의 축적에 따른 결과로 설명하기도 했다. 하지만 환국의 쟁점은 복제 논쟁, 역모 사건, 원자 정호, 중궁 복위, 특정인에 대한 평가, 상대 당에 대한 처벌의 강도, 왕위 계승 등 매우 다양하다. 이러한 쟁점을 둘러싸고 발생한 대립을 조정하려는 노력과 그에 따른 논리가 제기되는 것 외에도, 시비(是非)·정사(正邪)·충역(忠逆)을 기준으로 상대 당을 제거하고 자파(自派)의 정당성을 강화시키려는 움직임도 있었다.

다섯 번째로, 환국의 역사적 정체성과 방향성에 관한 문제이다. 환국은 조선후기 정치의 ‘완성형(完成型)’인 붕당 정치나 탕평 정치와는 달리 과도기적 형태로 인식되고 있다. 권력의 이동 또는 변동은 그 영향에 따라, 발전적 전환과 갈등적 순환으로 나눌 수 있다. 발전적 전환은 미래 권력의 등장, 새로운 이데올로기적 지형의 변화에 따른 주류 세력의 변화 등 권력의 본질적이고 구조적인 변동에 초점을 맞추어 조망한다. 반면에 환국은 갈등적 순환의 차원과 권력 투쟁적인 관점에서 붕당 간의 권력 획득 과정에 관심을 두었다. 즉 권력의 소재(所在) 변화에 초점을 맞춰 붕당 간의 일시적 권력 교체를 강조하고, 이러한 권력의 교체가 기존 권력 구조의 일시적 이완에 따른 결과임을 주장하였다. 하지만 환국의 역사적 정체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조선후기 정치적 과정에 미친 영향을 발전적 전환의 관점에서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변천

붕당 정치는 복수(複數)의 붕당이 상대 당을 인정하면서도 정치적으로 대립·견제하는 운영 형태를 띠며 시기적으로는 인조 때부터 현종 때까지 가장 안정된 모습을 갖추었다고 할 수 있다. 이때는 서인과 남인이 공존하면서 서인이 정국을 주도하고 남인이 견제·비판하는 형세였다. 이들은 대립하면서도 상대 당을 정국 운영의 참여자로 인정하여 균형을 유지했다. 하지만 이러한 균형은 현종과 숙종의 왕위 승계 과정에서 무너지기 시작했다. 환국은 바로 복수의 붕당이 공존하여 대립·견제하는 가운데 균형을 이루는 붕당 정치의 역학 구도를 바탕으로 발생했다. 그러다가 1728년에 소론과 남인 계열이 영조의 정통성을 부정하며 무신난(戊申亂)을 일으켰고 이를 진압한 영조는 붕당을 부정하며 온건파를 등용하여 탕평책(蕩平策)을 추구하였다. 이로써 정치 형태로서의 ‘환국 정치’는 종식되었다.

참고문헌

  • 강주진, 『이조 당쟁사 연구』, 서울대학교출판부, 1971.
  • 이성무·정만조 외, 『조선 후기 당쟁의 종합적 검토』,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2.
  • 이은순, 『조선 후기 당쟁사 연구』, 일조각, 1988.
  • 이태진, 『조선 후기의 정치와 군영제 변천』, 한국연구원, 1985.
  • 이태진·김백철 편, 『조선 후기 탕평 정치의 재조명(상)』, 태학사, 2011.
  • 이희환, 『조선 후기 당쟁 연구』, 국학자료원, 19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