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룡준(畫龍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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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청화 안료로 용과 구름을 그린 청화백자운룡문 항아리.

개설

조선시대 왕실에서는 궁중의 크고 작은 연례와 제례에서 술을 담거나 꽃을 꽂아 장식할 때 여러 가지 도자기 항아리를 사용하였다. 용준(龍樽)은 이러한 의례용 항아리의 하나이다. 대개 그릇의 높이가 높고 어깨가 넓은 반면에 하체가 좁아 기형상 입호(立壺) 또는 장신호(長身壺)라 부르는 대형 백자 항아리의 표면에 청화 안료로 용 문양을 그려 넣었다. 용 문양은 장식 효과뿐만 아니라 그릇을 쓰는 사람의 권위나 신성함을 상징하였다. 따라서 고려시대나 조선시대에 용 문양이 시문된 도자기는 주로 지배 계층에서 극히 제한적으로 사용되었다. 특히 조선백자의 용 문양은 임금의 권위와 위엄을 상징하였다.

연원 및 변천

용 문양은 왕의 상징이다. 그러나 연향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는 헌작시에는 왕세자빈까지 화룡준(畫龍樽)을 사용하였다. 조선초기의 용문양은 중국의 문양 양식을 따랐지만 점차 조선화되어 16세기의 운룡문 도상은 점차 중국과 다른 독특한 특징을 드러냈다.

1502년(연산군 8)에 연산군이 중국 사신이 올 때에도 잘 사용하지 않는 귀한 물건인 화룡준을 맏딸인 휘순공주(徽順公主)의 집에 내리도록 하자 신하들이 등급의 분별을 내세우면서 반대하여 그 명을 거두게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연산군일기』 8년 10월 29일). 이로 미루어 볼 때 청화백자운룡문 항아리는 여러 점이 제작되어 왕실을 중심으로 공사(公私) 간에 사용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인조 연간에는 의식에 사용하는 화룡준을 왕실의 공식 행사에 사용하는 경우가 빈번하였다. 인조에서 경종에 이르는 동안에 제작된 운룡문을 시문한 청화백자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는데 아마도 임진왜란의 폐해로 청화를 사용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일 것이다. 결국 철화용준이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숙종 연간에 청나라로부터 청화 안료인 코발트를 다시 수입하게 되면서 청화백자를 다시 제작하였다. 이 시기의 운룡문은 우화적 표현보다는 정교하고 사실적인 모습이 특징이다. 18세기 중·후반에는 국내외 정세의 안정으로 인해 청화백자가 안정적으로 생산되었다. 이로써 청화백자를 사용할 수 있는 저변이 확대되었는데, 이는 사치에 대한 우려로 이어졌다. 이와 관련하여 영조대에 화룡준에 대해 언급한 기록이 남아 있다. 이전에는 진연(進宴) 때 철화백자의 안료인 산화철인 석간주(石間硃)로 그림을 그려 화룡준을 제작하였는데 지금은 더 이상 철화로 화룡준을 제작하지 않으며, 여전히 청화 안료가 귀한 물건임에도 불구하고 청화백자를 사용하고 있다는 내용이다. 영조는 1754년(영조 30)에 사치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화룡준을 제외한 청화백자 사용을 금지하는 명을 내렸다(『영조실록』 30년 7월 17일). 그러나 청화백자의 사용에 따른 사치 풍조에 대해 왕실에서 모본을 보이며 경계해야 하였지만 의례기로서 사용되는 화룡준은 반드시 청화백자로 제작되어야 하므로 이러한 조치에서 제외시켰다. 이는 연향에서 화룡준의 필요성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형태

1795년(정조 19)에 행해진 왕의 수원 화성 행차를 기록한 『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에 화룡준의 형태가 묘사되어 있다. 구연부는 직립이고, 구연부에서 내려오는 곡선은 원형을 이루다가 어깨 부근에서 팽창하며 벌어졌다가 다시 오므라든 상태로 다리 부근에서 직사선을 이루면서 굽까지 내려온다. 실재하는 유물들을 보면 거의 S자와 유사한 형태를 이루고 있다. 운룡문을 살펴보면, 종속문은 상부 여의두와 하부 연판문으로 구성되어 있고, 구름은 만(卍) 자형과 영지형이 공존했음을 알 수 있다. 용은 사조 혹은 오조로 추정되고 갈기는 뒤로 향하고 비늘은 촘촘하게 구획되어 있어서 전체적으로 실제 청화백자에 등장하는 운룡의 모습과 같다.

생활·민속 관련 사항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를 살펴보면, 1626년(인조 4) 윤6월 13일의 기록에 화룡준에 대한 내용이 있다. 연향에 사용할 화준을 마련할 방법이 없어서 종이에 그림을 그려 붙이거나 무문백자 위에 그림을 그려 장식하는 가화(假畵)를 사용하기도 하였는데, 이것이 민망하여 중국 사신 행차를 따라가는 역관에게 중국에서 화룡준 1쌍을 사 오도록 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화룡준은 꽃을 꽂는 화준(花樽)으로 볼 수 있다. 주준(酒樽)으로 사용되는 화룡준은 보통 1개가 수주정(壽酒亭) 위에 놓이므로 쌍으로 필요하지는 않으나 화준은 정전(正殿) 앞 기둥 양쪽에 배설하기 때문에 항상 쌍으로 준비해야 했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국립중앙박물관, 『백자 항아리』, 국립중앙박물관, 2010.
  • 방병선, 『조선 후기 백자 연구』, 일지사, 2000.
  • 방병선, 『순백으로 빚어낸 조선의 마음, 백자』, 돌베개, 2002.
  • 방병선, 『왕조실록을 통해 본 조선도자사』, 고려대학교출판부, 2005.
  • 방병선, 「雲龍文 분석을 통해서 본 조선 후기 백자의 편년 체제」, 『미술사학연구』 220, 한국미술사학회, 1998.
  • 신승인, 「朝鮮後期 王室 宴享用 白磁 花樽 硏究」, 이화여자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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