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마비(下馬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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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궐, 종묘, 문묘 등의 앞에 세운 비석으로,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누구나 타고 가던 말이나 가마에서 내리도록 지시한 푯돌.

개설

하마비(下馬碑)는 1413년(태종 13)에 종묘의 궐문 입구에 표목을 세운 것이 처음이다. 이곳에는 “이곳을 지나는 사람은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모두 말에서 내려야 한다[大小官吏過此皆下馬].”라고 적었다(『태종실록』 13년 1월 21일). 조선시대에는 궁이나 종묘, 문묘, 왕장이나 성현, 고관의 출생지나 분묘 앞에 세워졌다.

연원 및 변천

하마비는 궁궐이나 향교, 혹은 사찰이나 옛 고택 등의 앞에도 있었다. 이 하마비가 서 있으면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누구나 타고 가던 말에서 내리라는 뜻이다. 하마비의 한편이나 뒤쪽을 보면 ‘大小人員皆下馬’라고 적혀 있다. 여기서 ‘대소인(大小人)’이란 당하관인 종3품 이하의 관원을 뜻한다. 또한 원(員)이란 당상관을 말한다. 우리가 옛 각판 등에서 볼 수 있는 정3품 통정대부 이상을 말하는 것이다. 거의 모든 하마비에는 위와 같은 ‘대소인원개하마’라고 적혀 있다.

전국의 하마비는 대체로 비슷한데, 전주 경기전 앞에 있는 하마비는 일반적인 것들과 조금 다르다. 경기전은 전주에 있던 어용전(御容展)을 가리키는데 1598년(선조 31) 정유재란 때 소실된 것을, 1614년(광해군 6)에 고쳐 지었다. 어용전은 1410년에 완산과 계림, 평양에 건물을 짓고 태조의 어진을 모신 곳으로 1442년(세종 24)부터 지역마다 이름을 달리 불렀다고 한다. 경기전 입구에 보면 특이하게 생긴 하마비가 서 있다. 일반적으로 하마비는 하나의 돌로 조성을 하는 것에 비해, 경기전 앞의 하마비는 밑에 두 마리의 해태가 비를 받치고 있는 형태이다. 두 마리의 해태가 사각형의 넓은 판석을 이고 있으며, 그 위에 하마비를 세웠다. 판석에는 사방에 안상을 새겨 넣었다. 하마비의 표석에는 ‘至此皆下馬 雜人毋得入’이라고 적혀 있다. 즉 이곳에 이르거든 누구나 다 말에서 내려야 하며, 잡인을 일절 들이지 말라는 뜻이다. 이 하마비는 1614년에 세웠으며, 그 후 1856년에 증각을 하였다. 대개의 하마비는 비의 중앙에 ‘하마비’라고 음각을 한 후, 한편에 대소인원개하마란 글귀를 적어놓는 방법을 택한다. 하지만 경기전 앞에 서 있는 하마비는 하마비라는 글자를 음각하지 않고, 양편으로 나누어 글귀를 내리 음각했다. 아마도 이 경기전이 태조의 어진을 모셔놓은 곳이기 때문에, 이렇게 특별한 하마비를 세운 듯하다.

형태

하마비는 대개 하나의 돌로 조성을 한다. 돌의 위를 둥그렇게 조형을 해 길게 세우는 것이 일반적인 하마비의 모습이다. 하지만 특별하게 만든 하마비도 있다. 자연석을 그대로 이용해 하마비를 만든 곳도 있고, 돌에다가 하마비라고 각자를 해놓은 것들도 있다.

생활·민속 관련 사항

하마비 앞에서는 지위를 막론하고 모두 말에서 내려야 했다. 그러나 예외도 있었다. 고을의 방백 등이 자신의 지위를 과시하기 위함인지는 몰라도, 자신의 직급을 적고 그 밑으로는 다 말에서 내리라고 적은 글귀도 보인다. 이런 예외적인 하마비는 고을의 수령이 근무를 하는 관아 입구에 놓여 있기도 하다. 또한 하마비 앞에서 하급 관리가 상급 관리의 앞을 지나면서 말에서 내리지 않아 처벌을 받기도 하였다(『명종실록』 4년 4월 18일).

참고문헌

  • 김철배, 「조선초기 태조진전의 건립과 경기전」, 『전북사학』 34, 전북사학회, 2009.
  • 이준곤, 「송광사 하마비 교감」, 『불교문화연구』 11, 동국대학교 불교문화원,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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