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추문(泰秋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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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 서쪽 내궁장에 있는 북문.

개설

태추문(泰秋門)은 요금문과 함께 창덕궁의 북서쪽을 담당하는 문이었다. 창덕궁의 서쪽 외궁장은 효종대에 기존의 궁장보다 바깥으로 물려 새로 쌓았다. 장렬왕후를 위해 영건하게 된 대비전인 만수전 영역을 조성할 때 계획한 규모대로 전각들이 들어설 경우, 궁궐 서쪽이 너무 협소하게 되어 순라가 도는 자리조차 얻기 어려운 형세가 되었다. 이 때문에 효종은 신하들의 만만치 않은 반발을 눌러야 했고, 공역이 커지며 역사를 중단하는 사태를 감수하면서까지 지세를 넓혔다. 이때 태추문을 중심으로 창덕궁 서북 궁장의 주변 형세가 바뀌게 되었다.

변천 및 현황

『만수전수리도감의궤』 1656년(효종 7) 10월 14일의 기록에 의하면, 서쪽의 궁장과 석교, 수각의 공사는 이미 물길의 모양을 완전히 파내어 열어두었고, 태추문 가까이에 있는 옛 궁장도 열어 도총부 일소와 누각 서측 월랑 1칸에 문을 만듦으로써 순라가 통하는 길이 되게 하였다. 이때 기존의 태추문 서쪽에 내·외 두 겹의 궁장을 쌓고 내궁장 안에 정원을 조성하였다. 그 너머 외궁장과 내궁장 사이는 순라가 다니는 길을 내었다. 서쪽 외궁장에는 새로 경추문을 건립하였으니 이때 태추문은 만수전 영역의 북쪽을 개폐하고 연결하는 역할을 하게 되었다.

1704년(숙종 30)에 왕이 궁장 밖 서북쪽 지역에 있던 별대영의 창고들을 철거하고 대보단을 쌓았다. 그때부터 태추문은 대내에서 대보단으로 나가는 연로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 후로 1900년대 초까지 잘 남아있었으나 일제강점기에 훼철되었고 지금은 없는 문이다.

위치 및 용도

창덕궁의 서쪽에는 궁장을 따라 북에서 남으로 금천이 흘러내리는데 요금문의 남쪽에 금천을 가로질러 서 있는 수각이 있었다. 그 남쪽에 다리를 놓아 동서로 이어진 담장이 다리 위를 지나가도록 만들어놓았는데 다리를 지난 담장의 평지 끝, 몇 보 안에 태추문이 있었다. 문 안에는 ‘ㄴ’자 형태의 마당이 있고 마당 남쪽에 연화문이 있었다. 마당의 동쪽에는 수직관직소와 영모당, 그 동쪽에는 경복전이 있었다. 태추문은 대내에서 대보단을 출입할 때 왕의 연이나 여가 움직이는 동선에 있는 문이었다(『영조실록』 37년 7월 30일).

형태

태추문은 서쪽으로는 평지형 담장이, 동쪽으로는 경사지형 담장이 층층이 놓인 가운데, 즉 양쪽에 다른 형태의 담장을 끼고 솟을문으로 놓였다. 1칸 규모에 사주문(四柱門) 형식을 취했고, 지붕은 맞배지붕을 이고 있다. 「동궐도」 상에는 문짝이 표현되어 있지 않으나 이것은 문이 열려 있음을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일성록(日省錄)』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창덕궁만수전수리도감의궤(昌德宮萬壽殿修理都監儀軌)』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조옥연, 「조선궁궐의 동조건축에 관한 연구」, 경기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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