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순당(忠順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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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에서 빈전이나 왕의 거려(居廬)로 사용하던 전각.

개설

충순당은 경복궁 후원에 있었다. 건립된 시기는 명확히 알 수 없으나 세종대까지 대군들이 교대로 충순당에 거처하였다고 하였다. 이것으로 보아 세종 연간에 이미 사용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대내(大內)와 담장으로 분리되어 있어 유생들을 모아 시험을 보고 후원의 넓은 터를 이용하여 활쏘기 행사가 주로 이루어졌다. 왕이 친히 국문(鞫問)하는 장소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조선전기 왕실의 상장례를 치르는 공간으로 사용되었으며, 국상이 발생하면 이곳을 왕의 여막(廬幕)으로 사용하였다. 본래 여막은 초가로 단칸 규모로 조성하였으나, 실제 왕이 머물기는 어려워 침전으로 사용되는 건물보다 격이 낮은 ‘당(堂)’이나 행각에 마련된 방[閤]을 여막으로 이용하였다.

위치 및 용도

왕실의 상장례와 관련하여 사용된 사례는 1469년(성종 즉위)에 예종의 빈전이 설치된 것이 대표적이다(『성종실록』 즉위년 12월 3일). 또 문종이 세종의 국상(國喪) 동안 이곳에서 보냈다(『문종실록』 즉위년 6월 25일). 단종은 문종의 국상 기간에 왕의 여막을 조성하는 대신 충순당에 거처하였다(『단종실록』 1년 7월 5일). 모두 국상 기간에 왕의 거려(居廬)로 사용한 것이다.

충순당을 가장 활발하게 사용한 왕은 세조였다. 그는 주로 이곳에서 활쏘기 행사를 벌였으며, 경서(經書)와 의서(醫書) 등을 강론하였다. 행사가 끝나면 주연을 베푸는 일이 잦았다. 1458년(세조 4)과 1461년(세조 7)에는 왕비와 함께 공신의 공과 노력을 위로하기 위한 잔치를 베풀었으며, 음복연(飮福宴)을 베풀었다(『세조실록』 4년 11월 17일)(『세조실록』 7년 2월 9일).

농사 및 기후에 관련해서도 이 건물을 이용하였다. 세조는 후원에서 농사짓고 누에 치는 것을 충순당에서 살펴보았고, 1460년(세조 6)에는 충순당의 연못에서 석척기우제(蜥蜴祈雨祭)를 행하였다(『세조실록』 6년 5월 29일). 1540년(중종 35)에는 기후를 살피는 장소로 충순당 근처에 자리를 만들고 관상감(觀象監) 관원이 이 일을 담당하도록 하였다(『중종실록』 35년 5월 29일).

충순당은 조선초에는 여막이나 재실의 기능이 있었다. 그러나 세조 연간에 왕이 활쏘기 행사와 주연을 자주 베풀고 공신들을 위한 잔치 등을 벌이면서 성격이 변화하였다.

변천 및 현황

임진왜란으로 경복궁이 소실되면서 함께 사라진 것으로 보이며, 고종 연간에 경복궁을 조성할 때 충순당은 재건되지 않았다.

형태

관련사건 및 일화

1545년(명종 즉위) 8월 왕과 대비였던 문정왕후(文定王后)가 충순당에 들어 윤임(尹任), 유관(柳灌), 유인숙(柳仁淑)의 죄를 논하고 유배시킨 뒤 사사(賜死)하였다. 당시 문정왕후가 충순당의 온돌방 창 안에서 발을 드리우고 남향으로 앉았으며, 명종은 창 밖에 약간 서쪽으로 물리어 동향으로 앉아 대비에 의해 수렴청정 하였다.

참고문헌

  • 『궁궐지(宮闕志)』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