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淸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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멥쌀이나 찹쌀로 만든 술떡을 누룩가루와 섞어 발효시킨 후 용수를 술독에 박아 맑은 부분을 떠낸 술.

개설

누룩가루를 물이 담긴 독에 넣은 다음에 찹쌀가루로 찐 떡을 넣어 밑술을 만든 뒤 다시 멥쌀과 누룩 그리고 물을 넣어 빚은 술이다. 술독에 용수를 박아 맑은 술을 떠내면 약주가 된다. 갈색을 띤 연노랑의 투명한 술이지만, 아주 투명하지는 않다. 알코올 도수는 12~20%이다. 보통 ‘맑은 술’이라고 부른다.

만드는 법

멥쌀로 밥을 짓고 누룩과 물을 섞어 술을 담근다. 겨울에는 25일, 봄·가을에는 15일, 여름에는 10일이 지나서 용수를 술독에 박고 술지게미가 가라앉기를 기다린다. 용수 속에 국자를 넣고 술을 떠낸다. 『음식디미방[飮食知味方]』에 나오는 여러 가지 술 만드는 법 중에 점감청주(粘甘淸酒)가 있다. 찹쌀을 많이 넣어 단맛이 강한 술이라는 뜻이다. “찹쌀 1말을 깨끗이 씻어 죽을 쑨 다음 식지 않은 상태에서 냉수에 좋은 누룩 2되를 풀고 핫것으로 두텁게 싸서 하룻밤 재워 익거든 짜서 쓴다.”고 했다. 핫것은 솜을 두어 지은 옷이나 이불 따위를 말한다.

연원 및 용도

『고려도경(高麗圖經)』에는 “나라에는 찹쌀이 없다. 멥쌀을 누룩에 섞어 술을 만든다. 술의 빛깔이 짙고 맛이 독해 쉽게 취하지만 빨리 깬다. 왕이 마시는 술을 양온(良醞)이라고 부른다. 궁궐의 좌고(左庫)에는 청주(淸酒)와 법주(法酒) 2종류의 술이 있다. 옹기로 만든 술독에 담아 황견(黃絹)으로 봉해 둔다.”고 했다. 이로 미루어 고려시대부터 왕실에서는 청주를 만들어 마셨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규보(李奎報)는『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에서 “두보(杜甫)가 본래 궁했던 사람이라 역시 그 습관으로 인하여 말한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고 하면서 자신은 탁주보다 청주가 더 맛있다고 했다. 그는 “내가 예전에 젊었을 때 백주(白酒), 즉 탁주 마시기를 좋아한 것은 맑은 술을 만나기가 드물어 늘 막걸리를 마셨기 때문이었는데, 높은 벼슬을 거치는 동안에 늘 청주를 마시게 되매 또 막걸리를 좋아하지 않으니 습관이 되었기 때문인가. 요새는 벼슬에서 물러나 녹이 준 때문에 맑은 술이 계속되지 못하는 때가 있어 하는 수 없이 막걸리를 마시는데, 금방 얹혀서 기분이 나쁘다.”고 밝혔다.

한반도의 중부 지역 이남에서는 쌀이 많이 생산되기 때문에 이 지역에서는 청주가 고급술로 여겨졌다. 특히 조선시대에 개성 이남에서는 쌀로 빚은 청주를 가장 으뜸으로 여겼다. 제법에 따라 특정의 약재를 넣어 빚기도 한다. 약이 된다고 하여 약주(藥酒)라고 불렀다. 청주는 맑은 술 전체를 부르는 통칭으로 쓰였다. 이로 인해 청주를 빚는 법에 대한 기록은 잘 보이지 않는다. 주로 순향주(醇香酒)·삼해주(三亥酒)·이화주(梨花酒)·송화주(松花酒)·소곡주[小麯酒] 등이 모두 청주의 한 계통이다. 청주는 단맛에 비해 알코올 도수가 높아 민간에서는 ‘앉은뱅이 술’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마실 때는 달아서 좋지만 몇 잔 마신 후에는 일어날 수 없을 정도로 급하게 취하기 때문에 생긴 말이다.

조선초기에는 종묘와 사직에 제사 지낼 때 예법에서 구분했던 5가지의 술인 오제(五齊)를 모두 청주로 사용하였다. 이런 관습으로 인해 왕실 제향이나 민간의 제례에서 청주는 제주(祭酒)로 쓰였다. 왕실과 관에서는 계절에 맞는 여러 청주를 매번 빚었다. 왕은 신하들의 노고를 치하할 때 청주를 선물로 내렸다. 일본 쓰시마 섬에도 청주를 선물로 하사하였다(『태종실록』 7년 10월 19일). 세종대에 금주령이 내려졌을 때에도 청주는 양반들 사이에서 선물로 주고받았다. 그만큼 청주는 고급술이었다. 민간에서도 손님이 올 때 접빈(接賓)의 술로 집집마다 빚은 가양주(家釀酒)로 대접을 하였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고려도경(高麗圖經)』
  •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 『성호사설(星湖僿說)』
  • 『음식디미방[飮食知味方]』
  • 『주례(周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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