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례문(集禮門)

sillok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창경궁 명정문 밖 남쪽 행각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문.

개설

집례문(集禮門)에 관한 기록은 『조선왕조실록』에서 한 번, 『승정원일기』와 『일성록』에서는 10여 차례 이상 등장하고 있다. 그러나 「동궐도」와 「동궐도형」에서는 집례문의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승정원일기』와 『일성록』을 살펴보면, 집례문은 각 의례 시에 왕의 동선을 따라가다 보면 동룡문과 홍화문 사이에 있음이 드러나고, 또 동선의 방향을 바꾸어 따라가다 보면 홍화문과 문정문 사이에 있던 문으로 추측된다.

위치 및 용도

창경궁의 명정전을 두르는 행각과 마당에는 2개의 영역이 있는데, 하나는 홍화문과 명정문 사이의 마당, 또 하나는 명정전과 명정문 사이의 마당이다. 홍화문과 명정문 사이에는 금천이 흐르고 옥천교가 놓여있어 이를 건너면 명정문으로 들어간다. 이 영역의 북쪽과 남쪽에 마주 보는 행각이 놓였는데 북쪽 행각의 문은 숭지문이라 하고, 「동궐도」와 「동궐도형」에 명확히 기록되었다. 그런데 남쪽의 행각은 서쪽 끝에 문이 있으나 이 문의 이름이 무엇인지는 「동궐도」와 「동궐도형」 어디에도 표시되어 있지 않다. 문헌의 기록으로는 홍화문을 통과할 때 왕의 동선에 자주 등장하는 문으로 기록되었다.

변천 및 현황

1485년(성종 16)에 창경궁이 창건되었을 때 함께 조성되었을 것으로 판단되며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광해군이 창경궁을 복원할 때 함께 복원된 것으로 보인다. 「동궐도형」에 문의 이름은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집례문으로 추측되는 문은 계속 남아있던 것으로 보아 1900년대 초까지 존재하였다가 일제강점기에 사라졌고, 이것을 다시 1986년 창경궁 복원 정비 시에 명정전 권역의 복원과 함께 복원된 것으로 보인다. 본래는 방들이 마련된 행각 사이에 있는 문이었으나 1986년에 복원되면서 열주랑으로 구성된 월랑의 사이에 있는 문의 형태를 취하게 된 것이다.

형태

집례문의 본래 형태는 행각의 끝에 행각보다는 지붕의 높이를 높였고 독립적으로 서 있는 문이었다. 사주문(四柱門)의 구조를 취하였고 주칠을 한 2짝 판장문을 달았으며 맞배지붕으로 기와를 얹었다. 그러나 복원된 현재의 문은 행각 안에 평문으로 들어 있으며, 주칠을 한 2짝 판장문을 달았고, 상인방 위에 안상의 모양대로 풍혈을 뚫은 3개의 궁판을 대고, 그 위에 홍살을 설치했다.

관련사건 및 일화

정조 때 왕이 경모궁을 전배하기 위해 왕이 타고 나갈 연의 동선 안에 집례문이 있는데 들보가 썩어 문의 반쪽이 무너져 내렸다. 그런데 이러한 사실을 미리 알리지 않아 왕의 거둥을 지체하게 만든 사건이 있었다. 창경궁의 정전 영역에 들어 있는, 결코 소홀하게 여길 문이 아니었는데도 서로 책임을 미루는 모습을 보여 왕을 더욱 노하게 하였다(『정조실록』 5년 8월 11일).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일성록(日省錄)』
  • 『만기요람(萬機要覽)』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