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연도감(進宴都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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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실에서 거행한 잔치 의식인 ‘진연’을 주관하기 위하여 설치한 임시 관청.

개설

조선 왕실에서 큰 경사가 있을 경우 잔치 의식을 행하는데 이를 진연이라 하였다. 왕실의 탄신, 왕의 기로소(耆老所) 입소, 왕실의 행차 의식 등에서 진연을 베풀었다. 진연을 준비하기 위해 진연도감이나, 진연소, 진연청을 설치하고 잔치 의식을 주관하게 했다. 진연도감에서는 잔치 의식이 끝난 후, 잔치의 전 과정에서 주고받은 문서, 잔치 참여자의 배치도, 잔치에 사용한 물품, 기녀들의 명단 등을 작성하여 『진연의궤』를 편찬하였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왕실의 잔치 의식을 보다 체계적으로 거행하고 법도에 맞게 추진하기 위하여 진연도감을 설치하였다. 진연도감에서는 당상과 낭청 등 책임자와 실무자를 배치하여 연향(宴享)의 일을 분담하여 준비하고 진행했다. 진연의궤는 1719년(숙종 45) 9월 숙종의 기로소(耆老所) 입소를 축하한 『(기해)진연의궤』, 1744년(영조 20) 10월 영조의 기로소 입소를 기록한 『(갑자)진연의궤』, 1901년(고종 38) 7월 고종의 보령 50세를 축하한 『(신축)진연의궤』, 1902년 4월 고종의 기로소 입소를 축하한 『(임인 4월)진연의궤』, 1902년 11월 고종의 즉위 40년을 축하한 『(임인 11월)진연의궤』 등이 있다.

조직 및 역할

진연도감은 다른 도감과 마찬가지로 진연 의식을 주관하는 당상과 낭청으로 구성되어 있다. 진연도감이라는 용어 외에 진연소나 진연청이란 말을 사용하기도 했다. 1902년에 작성한 『고종임인 진연의궤』에서는 진연도감이라 하지 않고 진연청이라 칭했다. 진연청의 역할은 진연도감과 같으며 진연청의 구성 조직은 다음과 같다. 책임자로는 당상을 두었고, 그 밑에 실무 낭청이 배치되었다. 그리고 별간역(別看役)·간역(看役)·서제(書題)·서사(書寫)·고직(庫直)·사령(使令)·사환(使喚) 등을 배치하여 진연 의식의 주요 실무를 담당하게 했다. 1744년의 『(갑자)진연의궤』에는 이속으로 이들 이외에도 수지기[守直]와 미포지기[米布直]가 설치되기도 하였다.

『조선왕조실록』에 ‘진연’이라는 용어는 여러 차례 등장하나, 정작 ‘진연도감’이 구성되었음을 알리는 ‘진연도감’에 관한 기록은 『영조실록』에 두 차례만 등장한다. 1743년 7월 21일에 “임금이 진연도감 당상을 불러 보고 하교하기를”이라는 기록과, “진연도감에서 쌀 1천 곡(斛)을 전례에 의하여 진연의 용도에 충당할 것을 계청하였다.”(『영조실록』 19년 7월 21일)는 기록이 나온다.

변천

『경국대전』에는 “의정부와 육조에서 단오, 추석, 행행(行幸), 시강(試講), 왕후 및 왕세자와 세자빈 탄신에, 충훈부에서 네 계절의 중간 달에, 종친부·의빈부에서는 매년 두 번, 충익부에서 매년 한 번 진연을 올린다.” 하고 규정하였다. 이처럼 왕실에서는 초기부터 진연 의식을 행하였다. 조선후기에 들어와 진연 의식은 진연도감, 진연청, 진연소 등을 구성하여 본격적으로 추진되었고 그 격식과 규모도 전기에 비하여 성대하였다. 진연 관련 의궤가 조선후기에만 등장하는 것도 이러한 상황이 반영된 것이다. 왕실의 잔치 의식으로는 진연 의식 이외에 진찬(進饌) 의식과 진작(進爵) 의식이 있었지만, 그 성격은 비슷하였다.

조선후기에는 궁중에서 진연·진작·진찬 등의 잔치를 베풀면 진연도감을 설치하고 진연도감에서는 의궤를 작성하였다. 의궤에는 행사에 대한 안건이 나오고 결정되는 과정, 치사(致詞)와 전문(箋文)의 시문, 연회에 사용하는 각종 물목, 연회 참석자의 명단, 악사들과 각 도에서 선발된 기생들의 명단, 이들의 임무와 역할 등에 대한 제반 사항을 상세하게 기록하였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갑자(甲子)진연의궤(進宴儀軌)』
  • 서울대학교 규장각 편, 『규장각 소장 분류별 의궤 해설집』, 서울대학교 규장각, 2005.
  • 서울대학교 규장각 편, 『규장각 소장 의궤 해제집 1』, 서울대학교 규장각,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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