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수기청자(種樹器靑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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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자로 만든 화분.

개설

종수기청자(種樹器靑磁)는 나무를 심기 위한 청자 그릇이므로 화분에 해당한다. 화분은 꽃이나 나무를 심어 집 안팎을 장식하는 물건이다. 조선시대에는 백자와 청자로 화분을 만들었으며, 화분의 외면을 여러 종류의 꽃무늬로 장식하였다. 질그릇으로 만든 화분도 널리 사용하였다. 자기로 만든 화분은 자분(瓷盆), 질그릇으로 만든 화분은 와분(瓦盆)이라 하였다.

연원 및 변천

조선시대 사대부들은 집에 다양한 꽃과 나무를 심고 감상했다. 1474년(성종 5)에 강희안(姜希顔)은 원예서인 『양화소록(養花小錄)』에 당시 사대부가 즐겼던 다양한 꽃과 나무에 대한 고유의 특성과 의미를 기록하였다. 또한 꽃과 나무의 재배법을 설명하고, 여러 재질의 화분에 대해서도 언급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추운 겨울에도 화분을 이용하여 꽃과 나무를 실내에서 감상했다.

종수기청자는 1477년(성종 8)에 유구(琉球) 왕이 성종에게 선물하였다는 기록이 있다(『성종실록』 8년 6월 6일). 당시 유구는 독자적으로 청자를 생산하지 못했고, 명나라와 동남아시아 나라들 사이에서 중계 무역을 했으므로 종수기청자는 중국에서 제작된 청자 화분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15세기 후반에 유구 왕이 조선 왕에게 선물할 정도의 수준을 갖춘 청자를 제작했던 곳은 중국의 용천요(龍泉窯)가 대표적이다.

용천요는 중국 절강성 용천현과 그 인근 지역에 자리했던 가마로, 주로 송나라에서 명나라 시기에 걸쳐 수많은 청자를 제작하여 중국 국내는 물론이고 국외로 수출했다. 용천요에서 제작된 화분은 일본과 동남아시아의 여러 유적에서 출토되었다. 우리나라 신안해저유적(新安海底遺跡)의 발굴에서도 여러 점의 청자 화분이 나온 바 있다. 신안 앞바다에서 확인된 침몰선에는 1323년(고려 충숙왕 10) 무렵에 중국 영파(寧波)에서 일본 교토의 동복사(東福寺)로 운송하려던 3만 점가량의 도자기가 실려있었다.

유구 왕이 선물한 종수기청자는 1대(對), 즉 한 쌍이었다. 두 점의 청자 화분은 청자 향로 한 점과 함께 선물되었으므로 향로의 좌우에 자리하여 공간을 꾸며주는 역할로 활용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형태

종수기청자는 나무를 심는 그릇이라는 용도가 이름에 반영된 것으로 보아 작은 꽃을 심는 화분보다는 다소 크게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조선시대 화분은 대부분 입지름이 밑지름보다 넓고 기측선은 구연부로 갈수록 벌어지는 형태이거나 원통형이었다. 일반적인 화분은 내저면의 중앙에는 배수를 위한 둥근 구멍이 뚫려있다.

참고문헌

  • 강희안 저, 서윤희·이경록 역, 『양화소록』, 눌와, 2012.
  • 국립해양유물전시관, 『新安船과 동아시아 陶瓷交易』,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