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총(鳥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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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약의 폭발력을 이용하여 연환(鉛丸)을 발사하는 화승식(火繩式) 점화법의 개인 휴대화기.

내용

조총은 말 그대로 날아가는 새를 맞혀 잡을 수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하늘을 나는 새를 잡을 수 있을 정도로 경이적인 화기라고 본 당대인의 인식을 알 수 있다. 조총은 중국 고대의 화창(火槍)이나 조선의 총통(銃筒)과 같이 개인이 휴대하는 것은 같지만 그 이외의 장치는 전혀 다른 새로운 무기였다. 조총의 원형은 중세 유럽에서 만들어졌다. 이 총이 스페인 선단에 의해 일본에 전해지면서 동양에 조총이 등장했다. 일본은 조총의 도입으로 전국시대를 종결시킬 수 있었으며, 그 여파로 임진왜란을 야기하였다. 조총은 임진왜란 이전에 일본인이 조선에 소개한 적이 있었지만, 본격적으로 도입된 것은 임진왜란 이후였다(『선조수정실록』 22년 7월 1일). 임진왜란 초기 일본인의 조총 사용에 크게 놀란 조선 정부는 조총을 조선군의 기본 화기로 도입하였다.

그렇지만 조총의 제작이 처음부터 용이하지는 않았다. 조총은 신무기이므로 중국이나 일본에서 그 기술의 전파를 꺼리는 비밀병기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조총 기술은 중국인을 매수하거나 임진왜란기 항복한 일본인에게 전수받는 것을 통해 이루어졌다(『선조실록』 26년 2월 10일)(『선조실록』 26년 6월 16일)(『선조실록』 26년 6월 16일). 조총은 초기에는 전쟁 중에 습득한 일본인의 왜총(倭銃)을 견본으로 국내 장인이 만들었다. 광해군대에는 조총청과 화기도감이 설치되면서 조총을 전담해서 만드는 장인이 등장하였다. 그러나 초기에 제작된 조총은 쉽게 파손되고 사격 시 빗나가는 수준이었다. 이에 따라 인조 초기까지도 일본에서 조총을 수입하는 실정이었다(『인조실록』 5년 5월 1일). 이후 정묘호란을 거치면서 국내의 조총은 일본과 대등한 수준이 되었으며 조총 제조 체제도 안정되었다.

조총의 제조는 주조법(鑄造法)과 타조법(打造法)이 있었다. 주조법은 초기 제조법으로 총통과 대형 화기 제조처럼 주물 제작 후 연마 과정을 거치는 것이다. 주조법은 많은 양을 단기간에 저렴한 비용으로 생산할 수 있는 장점을 지녔다. 반면에 주물 제작이므로 장기간 사용할 때 총열이 파열되는 위험성이 있었다. 타조법은 총열을 연마 절삭하는 방법으로 2명의 장인이 3일에 1개의 총열을 만들 정도로 시간이 오래 걸리는 방법이다. 반면 타조법은 총열 안의 둘레가 고르고 장시간 방포해도 안정적인 장점이 있었다. 타조법에 의한 조총의 제조 공정을 보면, 총신타조(銃身打造)→주련(注鍊)→착혈(窄穴)→부착물 접착→총신 제조→장가(粧家) 부착 등의 6개 과정으로 세분화되어 있다.

조선시대 조총의 제조와 매매는 국가만이 아니라 개인도 관여한 것이 특징이다. 인조대 청국의 침략에 대비하기 위해 필요한 조총을 민간의 시장에서 구매한 것에서 조총의 사조사매(私造私賣)가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인조실록』 2년 4월 25일). 인조대는 상번병이 지방으로 귀향할 때 조총을 휴대하도록 하여 지방 관아의 방포 훈련에 참가하도록 하여, 개인의 조총 휴대가 가능하도록 했다. 더욱이 조선후기로 갈수록 훈련도감, 어영청, 금위영의 군인까지 조총을 사조사매하는 일들이 나타나기도 하였다(『순조실록』 14년 2월 10일). 따라서 국법에는 무기의 사조사매가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었지만 조선후기 사회에서 조총을 비롯한 군기의 제조와 매매가 민간에서 광범위하게 이루어졌다고 생각할 수 있다.

용례

又啓言三軍門牒報以爲 弓箭外軍器 無得私造私賣 法禁至嚴 而近來藥丸銃刀 列肆爛賣 甚至作契都賈 若不嚴斷 後弊難言 自今申明舊典 嚴立科條爲辭矣 軍器之私造私賣 至於作契都賈者 不可以尋常亂廛論請 私造與都賈者 依私鑄錢私造曆律 斷以大辟 私相賣買之類 幷限死嚴刑 極邊勿限年遠配(『순조실록』 14년 2월 10일)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유승주, 『조선시대 광업사 연구』, 고려대학교출판부, 1993.
  • 허선도, 『조선시대 화약병기사 연구』, 일조각, 1994.
  • 이왕무, 「임진왜란기 조총의 전래와 제조-「철포기」를 중심으로」, 『학예지』10,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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