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통보(朝鮮通寶)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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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조선통보 |
한글표제 | 조선통보 |
한자표제 | 朝鮮通寶 |
동의어 | 석전(錫錢) |
관련어 | 저화(楮貨), 팔분체(八分體), 만력통보(萬曆通寶) |
분야 | 경제/물가·화폐 |
유형 | 물품·도구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조선 |
집필자 | 유현재 |
용도 | 화폐 |
재질 | 구리, 주석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조선통보(朝鮮通寶)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태종실록』 15년 6월 16일, 『인조실록』 11년 10월 15일, 『세종실록』 5년 9월 16일, 『인조실록』 11년 11월 4일 |
조선시대 태종·세종대와 인조대에 유통되었던 동전 형태의 화폐.
개설
조선통보는 구리를 기본 재료로 하여 만든 동전으로 태종대와 세종대 그리고 다시 인조대에 주전이 실시되었다. 관에서 동전 주조 계획을 처음 세운 것은 1401년(태종 1)이지만 실제 주전으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이후 1415년(태종 15)에 동전 제작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이 세워졌다. 당시에는 고액화폐인 저화(楮貨)를 제작하여 유통시키고 있었는데 이를 뒷받침해 줄 만한 소액화폐의 필요성이 대두된 것이다. 그 결과로 동전을 제작하였는데 최초로 나타난 것이 조선통보였다. 이후 세종대, 인조대에 조선통보가 주전되었는데, 저화와 마찬가지로 유통에 성공하지는 못하였다.
연원 및 변천
조선시대에 최초로 조선통보를 주조한 연대는 1415년(태종 5)이다. 당시 제작한 조선통보는 당(唐)나라 개원(開元) 연간의 오수전(五銖錢) 제도에 따라 제작하였는데 저화 1장의 가격과 조선통보 100전을 동일하게 적용하여 유통시켰다(『태종실록』 15년 6월 16일). 태종대 조선통보는 구리 1냥으로 10전을 주조하였는데 공적인 용도로 주로 사용하여 국가 재원에 활용하였다. 그러나 저화와 병행하는 과정에서 폐단이 나타났고 동전의 위조가 증가하여 여러 가지 문제가 축적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기근으로 재정이 악화되었고 결국 동전 제작에 소비되는 비용을 마련하지 못해 주전이 중단되었다.
조선통보가 다시 주전된 것은 1422년(세종 4)이다. 세종대의 조선통보도 저화와 같이 유통되어 저화의 가치를 보증해주는 보조화폐의 역할을 담당했다. 태종대의 경험을 바탕으로 세종대의 조선통보가 제작되었다. 그 당시 동전의 원료를 수급하기 위해 폐사된 절의 잔여물을 수합하거나 일본으로부터 구리를 수입하기도 했지만, 그 양이 충분하지 않아 민간에서 구리 1근을 바친 자에게 동전 160문을 나눠주며 원료를 마련하였다. 호조가 동전 제작 전반을 관리하였고, 사섬시와 지방의 각 군영에서 주전을 담당하였다. 1423년(세종 5) 11월부터 본격적인 주전이 시작된 이래 1427년(세종 9)까지 주전된 조선통보는 86,401관(貫)에 달했다. 민간에서 조선통보의 사용이 활발하게 나타나지 않을 경우 관리에게 녹봉으로 지급하여 동전 유통을 지속시켰다. 또한 민간에서도 공장(工匠), 행상(行商) 등에게 거두는 세금의 일부를 동전으로 강제하여 유통을 장려하였다. 그러나 저화의 가치를 보장해줄 정도로 조선통보가 주전되지 못해 결국 두 화폐는 모두 시장에서 퇴장하고 말았다.
이후 조선통보의 주전이 다시 등장한 것은 1625년(인조 3)이다. 이때 호조의 건의가 있었는데, 1633년(인조 11) 인조는 주전청을 설치하고 호조의 당상관을 주축으로 호조 낭청 2명과 상평청 낭청 2명을 배치하여 주전을 실시하였다. 당시 주전량과 동전의 품질은 상평청에서 감독하였다. 동전의 품질은 만력통보(萬曆通寶)를 기준으로 제작하였다. 세종대에 주전된 조선통보와 구별하기 위해 동전에 새기는 글자체를 팔분체로 하였다. 이때의 조선통보는 주원료가 구리냐 주석이냐에 따라 동전과 석전(錫錢)으로 구분되었고 그 가운데 석전은 1문 가격이 쌀 1승을 기준으로 거래되었다. 1635년(인조 13)까지 주전된 조선통보는 원재료가 부족하여 대략 2,000여 관 정도 주전된 것으로 보인다.
형태
조선통보는 둥근 외형에 사각형의 구멍이 뚫린 형태였다. 인조대 주전된 조선통보에 이전에 주전된 동전과 구분하기 위해 팔분체(八分體)로 ‘조선통보’를 새겨 넣었다는 내용으로 볼 때, 이전의 조선통보도 외형은 거의 같았던 것으로 보인다(『인조실록』 11년 10월 15일). 태종대와 세종대에 주전한 조선통보는 같은 무게로 주전되었다. 세종대의 조선통보는 당(唐)의 개원전(開元錢)을 표준으로 삼아 10전을 무게 1냥으로 하였다(『세종실록』 5년 9월 16일).
생활·민속 관련 사항
조선통보는 구리를 중심으로 여러 가지 금속을 합금한 동전이다. 따라서 금속이 갖는 본연의 가치가 있었다. 저화와 달리 실질가치가 있는 화폐였던 것이다. 특히 인조대의 조선통보는 저화와 같이 통용되지는 않았지만 현물가치가 있어 쌀이나 면포를 대체할 수 있는 교환 수단으로 민간에서 활용되었다. 그러나 활용이 매우 활발했던 것은 아니다. 인조대 조선통보 1문의 가치는 쌀 0.5두까지 하락하는 등 유통이 민간에서 원활하게 유지되지는 않았다(『인조실록』 11년 11월 4일).
참고문헌
- 원유한, 『한국화폐사-고대부터 대한제국시대까지』, 한국은행 발권국, 2006.
- 권인혁, 「세종대의 동전유통책」, 『제주대학교 논문집』19, 제주대학교, 1984.
- 박평식, 「조선초기의 화폐정책과 포화유통」, 『동방학지』158,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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