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공(朝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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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대(漢代) 이래 중국 황제의 책봉에 대하여 주변국 지배자들이 감사와 복종의 표시로 입조(入朝)하여 토산물을 공물(貢物)로 바치던 외교 의례. 조(朝)는 문안 인사를 뜻하는 입조 또는 배알(拜謁)의 예(禮)를 의미하며, 공(貢)은 예물로 바치는 방물(方物), 즉 각 지방의 토산물을 뜻함.

개설

조공과 책봉은 고대 중국의 봉건제도에서 유래된 것으로, 책봉받은 각 지방의 제후들이 종주국에 정기적으로 바치던 공물(貢物)이 곧 조공이었다. 이는 한 나라 이후에 중국 주변 이민족 국가들에 확장되어 의제적인 봉건 관계를 형성함으로써 중국이 주변국들을 통제하는 장치가 되었다. 중국의 황제들은 주변국의 군주들에 중국식의 작위와 함께 각 지역의 왕으로 책봉하여 그들의 지배권을 인정해 주었고, 주변국의 군주들은 이에 대한 보답으로 토산물을 바치고 종속을 다짐하는 의례를 행하였다. 이를 ‘조공 체제’, ‘책봉 체제’ 혹은 ‘조공책봉 체제’라고 부른다.

중원의 정통 왕조들은 주변국들에 대하여 이러한 조공-책봉 외의 평등한 외교 관계를 허용하지 않았으므로, 이 체제는 오랫동안 동아시아 특유의 국제 질서를 형성하게 되었다. 주변국의 지배자들에 대한 황제의 책봉은 대개 한 번 이루어지는 반면 주변국에서 바치는 조공은 매년 정기적으로 이루어졌다. 이 조공에 대하여 중국 황제는 상당한 가치의 반대급부, 즉 회사(回賜) 물품을 줌으로써 국제 무역적인 성격을 가지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부터 중국의 역대 왕조에 조공하고 책봉을 받는 외교 관계를 지속하였지만, 그 정형이 완성된 것은 조선시대부터였다. 조선이 중국에 바치는 조공은 연공(年貢: 歲幣)과 예물(禮物: 方物) 모두 토산물 중심의 의례적인 것이며, 조세의 성격을 갖는 것은 아니었다. 1637년(인조 15)에 청(淸)이 정한 세폐수목(歲幣數目)에는 쌀과 면포·금·은 등의 화폐적 성격을 갖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으나, 이들은 곧 감면되고 모시·명주·화문석·모피·종이 등의 예물이 중심을 이루었다. 이는 중국 각 지방에서 중앙정부에 납부하는 조세와는 그 수량이나 성격이 달랐다. 황제가 주는 회사품도 값비싼 것이기는 하였지만 역시 의례적인 것이었다. 이는 중국에 대한 조공이 하나의 외교 의례였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이러한 조공 체제는 1894년 청일전쟁에서의 패배로 중국이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상실하면서 폐지되었다. 그리고 서구 열강의 침략으로 청(淸)이 급격히 쇠약하여 반식민지 상태가 되면서 중국은 동아시아 지역에서 영향력을 상실하고 전통적인 조공 체제를 포기하게 되었다.

내용 및 특징

조공은 고대 중국의 주(周)나라에서 봉건제를 시행하면서 각 지방에 책봉받은 제후들이 정기적으로 방물을 가지고 천자를 배알하여 군신지의(君臣之義)를 다짐하는 의례였다. 이러한 의례는 천자가 제후들의 충성을 확보하고 전국을 통제하는 수단이 되었다. 한대(漢代) 이후에는 이를 주변 이민족들에게까지 확대하여 위무 포섭하는 외교 정책으로 발전시켰다. 중국은 책봉과 조공을 통하여 주변국들을 통제하여 변경을 안정시키고자 하였고, 주변국들은 황제의 권위를 빌려 지역적 통치권과 안보를 확립하고자 하였다. 이 때문에 전근대시대에 중국 주변에 있었던 만주·몽골·티베트·월남(越南) 및 중앙아시아 지역 대부분의 국가들이 이 체제에 포함되었다. 고대에는 일본도 중국에 조공을 하였고, 19세기에 서양 제국이 중국에 통상을 요구할 때도 이 형식을 따랐다.

우리나라와 중국과의 조공 관계는 삼국시대부터 시작되었다. 『삼국사기』에는 서기 32년(고구려 대무신왕 15) 후한에 조공을 바쳐 광무제(光武帝)가 고구려의 왕호를 회복시켜 주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후 고구려는 남북조의 여러 왕조와 수(隋)·당(唐)에 조공하였고, 백제와 신라도 이를 따랐다. 통일신라시대에도 조공-책봉 관계를 충실히 이행하였고, 그 때문에 당과의 문화 교류가 매우 빈번하였다. 고려와 송나라도 우호적인 외교 관계를 유지하였으나, 요(遼)·금(金)·원(元) 등의 이민족 국가들과는 여러 차례 전쟁을 벌인 후에 강요에 의한 사대외교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고려말에는 다시 한족이 세운 명(明)과 전통적인 조공-책봉 체제를 수립하였고, 이는 조선시대에도 그대로 이어졌다. 명의 홍무제(洪武帝)는 한때 고려에 매년 금 100근, 은 10,000냥, 말 100필, 세포(細布) 10,000필 등의 과도한 조공을 요구하였으나, 우왕(禑王) 때 금 100근, 은 5,000냥, 포(布) 5,000필, 말 100필씩으로 조정되었다. 이는 당시 북중국 일대를 평정하기 위한 명의 군사적 목적 때문에 과도하게 부과되었는데, 이 때문에 양국 사이에 외교적 마찰을 겪기도 하였다.

조선시대에 중국에 대한 우리나라의 조공이 제도적으로 완비되었다. 여말선초 명과의 조공 관계가 시작될 때 명은 3년에 한 번씩[三年一貢] 올 것을 요구하였지만, 조선은 1년에 세 번씩[一年三貢]의 조공을 주장하여 그렇게 귀결되었다. 정기적인 조공 사신들을 공사(貢使)라고 불렀는데, 하정사(賀正使)·성절사(聖節使)·천추사(千秋使)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 외에도 조선은 사은사(謝恩使)·주청사(奏請使)·진하사(進賀使)·진위사(陳慰使)·진향사(進香使)·주문사(奏聞使) 등의 이름을 붙여 비정기적인 사행을 보내기도 하였으므로 1년에 6~7회에 이르는 경우도 있었다. 이렇게 빈번한 조공을 자청한 것은 무엇보다도 사대에 성의를 다하려는 외교적 목적 때문이었지만, 경제적 이득과 선진문화 수용에 대한 욕구도 있었다.

조선시대 사신들이 수행하는 조공에는 표(表)·전(箋)이라는 외교문서와 함께 방물(方物: 禮物)이 수반되었다. 조선초기에 명에 보낸 정규 조공 물품들은 대개 금, 은, 그릇, 나전칠기, 명주, 모시, 백지, 화문석, 초피(貂皮), 수달피(水獺皮), 인삼, 말 등이었으나, 금과 은은 생산되지 않는다 하여 세종 때 감면되었다. 이 밖에 중국 측의 요구에 의하여 메, 어물, 주류 및 환관과 처녀들을 보내기도 하였다. 회사품에는 주로 은, 장복(章服), 사라능단(紗羅綾緞) 등의 비단, 자기, 서책 등이 포함되었다. 이들 물품은 조선에 없는 값진 것들이어서 국가적인 수요가 많았다. 또한 조선은 이러한 조공 체제를 모방하여 일본·여진·유구 등의 주변 이민족들에게 시혜를 베풀어 평화를 추구하는 교린 정책을 시행기도 하였다.

변천

조선시대에 확정된 명에 대한 조공품은 『대명회전(大明會典)』에 명시되어 있다. 그것은 금은기명(金銀器皿), 나전소함(螺鈿梳函), 백면주(白綿紬), 각색 저포(苧布), 용문염석(龍紋簾席), 각색 세화석(細花席), 초피, 수달피, 황모필(黃毛筆), 백면지(白綿紙), 인삼, 종마, 매 등이다. 이에 대하여 중국에서 주는 회사품은 대개 은, 장복(章服), 사라능단(紗羅綾緞) 등의 비단, 자기, 서책 등이었다.

병자호란이 끝난 1637년 이후 청에 대한 조공과 회사도 전대와 비슷하게 이루어졌지만, 이와 별도로 전쟁 배상금 형태의 과중한 세폐가 부가되었다. 여기에는 쌀 10,000포, 면포 10,000필, 명주 2,000필, 삼베 1,800필 및 황금(黃金), 백은(白銀), 수우각(水牛角), 호대지(好大紙), 호소지(好小紙), 표피(豹皮), 수달피, 녹피(鹿皮), 청서피(靑黍皮), 차(茶), 후추(胡叔), 소목(蘇木), 호요도(好腰刀), 순도(順刀), 오조룡문염석(五瓜龍文簾席), 잡채화석(雜彩花席), 백저포(白苧布) 등이 포함되었다. 쌀, 면포, 명주, 삼베 등은 수량이 과중하였고 금과 은 등도 포함되어 조선의 부담이 컸지만, 1644년(인조 22) 청이 중원을 차지한 후에는 대부분 감면되었고, 영조대에는 황금, 백은, 수우각, 표피, 청서피, 차, 후추, 소목, 순도 등도 제외되었다. 또 정기·비정기 사신들이 황제에게 바치는 방물에는 황세저포(黃細苧布), 백세저포(白細苧布), 황세명주, 백세명주, 용문염석, 황화석(黃花席), 만화방석(滿花方席), 잡채화석, 백면지 등이 있었다. 여기에 대하여 청이 조선 왕과 사신 일행에 주는 회사 품목에는 은, 채단(綵緞), 대단주(大緞紬), 황견(黃絹), 초피(貂皮), 내장단(內粧緞), 운단(雲緞), 안마(鞍馬), 흑화자(黑靴子) 등이 있었다.

조공과 회사의 물품을 조선후기의 가치로 환산해 보자면 황제의 회사품은 조선이 바치는 방물에 1/10에도 미달하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이러한 교환가치의 불평등은 사대외교에서 의례적 표현인 조공과 회사의 성격상 불가피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러한 사대외교를 통하여 조선은 대외안보를 보장받고 문화교류를 이어 갔던 것이다. 당시 양국의 물화에 대한 가격은 매우 추정하기 어렵고, 조공품과 회사품의 정확한 가격도 추산하기는 어렵다.

어떻든 양국의 물품 교환은 양국 쌍방의 수요에 의하여 이루어졌던 것이고, 서로에게 필요한 물자를 조달하던 방법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점에서 조선의 연공 및 방물과 중국의 회사는 공무역적 성격을 갖고 있었다. 18세기 이후에 청은 하정사·성절사·천추사 등의 정기 사행을 동지사(冬至使)로 통합하고 사은사 등의 특별 사행도 많이 줄였으므로 조선에서 보내는 사행도 매년 2회 정도에 그치게 되었다. 병자호란 후 청과 조선의 관계는 조선전기의 대명 관계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리고 국방이나 경제적 측면에서는 훨씬 유리해진 측면도 있었다. 이러한 외교는 정통 중원국가와의 전통적인 사대외교의 형식 때문이기도 하였지만, 항상 무력적 징벌의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에 조선이 세심하게 주의하여 관리해 나갔기 때문에 이루어진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중국에 대한 조공은 1894년 청일전쟁에서 청이 패배하여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상실하면서 폐지되었다. 서구 열강의 침략으로 청이 급격히 쇠약해져 서양의 반식민지 상태가 되면서 중국은 동아시아 지역에서 종주 국가로서의 영향력을 상실하고 전통적인 조공 체제를 포기하게 되었다.

의의

조공외교는 동아시아 지역의 보편적인 국제 질서로서 중국 주변 국가들의 공통된 외교 관행이었지만, 이러한 외교 체제 속에서 오랜 기간 외적의 침입을 피하고 국내외적인 정치 안정을 유지할 수 있었다. 조선은 1년에 3회의 정기적인 사신 파견과 여러 가지 명목의 비정기적인 사신들을 파견하여 조공하고 회사를 받았다. 여기에는 외교적인 목적 외에도 경제적인 실익과 선진문화 수입의 욕구가 내재해 있었다. 이러한 국제 질서 속에서 우리 민족은 중국과의 조공외교 및 주변 이민족들에 대한 교린 정책을 적절히 구사함으로써 장기간의 평화와 안정을 누릴 수 있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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