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신(電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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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떨어진 곳에서 전류나 전파를 이용하여 약정된 부호 신호의 방식으로 정보를 주고받는 통신.

개설

1885년(고종 22) 9월 서울과 인천 사이에 최초로 전선이 가설되면서 한국에서 전신(電信)은 시작되었다. 이후 전신 전담 관청을 세우고 서로전신선(西路電信線), 남로전신선(南路電信線), 북로전신선(北路電信線) 등을 개설하여 근대적 전신 제도를 구축해 나갔다.

연원 및 변천

1882년(고종 19) 조선 정부는 전신과 우편 사무를 관장하는 우정사(郵程司)를 설치하고, 이어 홍영식을 총판에 임명하여 전신 도입을 위한 노력을 했지만 성과를 내지 못하였다.

최초의 전신은 1885년 9월 서울과 인천에 최초로 전선이 가설되면서 도입되었고, 이를 관할하기 위해 한성전보총국(漢城電報總局)이 개국되었다. 이후 전신선의 사업은 지속되어 1885년 10월에 서울에서 의주까지 전신이 가설되어 인천-서울-의주에 이르는 서로전신선이 완전 개통되었다. 이를 통하여 청나라를 거쳐 유럽까지의 국제 전신도 연결되었다. 단 서로전신선의 관리는 청나라가 담당하였다.

1888년 6월 서울과 부산을 잇는 남로전신선이 개통되었다. 조선 정부는 1887년 3월 서로전신선을 운영하는 한성전보총국과는 별도로 조선전보총국(朝鮮電報總局)을 창설하고 독자적인 전신 사업을 시도하였다. 이를 계기로 전기통신법의 시초인 「전보장정(電報章程)」이 제정되고, 오늘날까지 사용되는 국문 전신 부호가 마련되어 전신 사업의 자주적인 발전을 이룩하는 계기가 되었다.

1891년 6월 서울에서 원산에 이르는 북로전신선이 개설되었다. 이는 본래 함경도를 거쳐 블라디보스토크까지 연결시켜 우리의 전신선을 동양 3국의 주요 간선으로 발전시키고자 하는 의도에서 추진된 것이었다.

1894년 청일전쟁이 일어나자 일제는 서로전신선과 북로전신선을 군사용으로 강점하여, 남로전신선만이 우리 관할하에 있게 되었다. 청일전쟁이 끝난 뒤에도 일본은 강점한 전신 선로를 반환하지 않았다. 그러나 일본은 러시아, 프랑스, 독일의 삼국간섭과 이에 따른 제국 열강의 압력으로 1896년까지 불법 강점하였던 전신 선로를 반환하였다.

1904년 러일전쟁 때에는 청일전쟁 중에 불법으로 가설한 군용 전신을 철폐하지 않고, 이를 보호한다는 명목하에 군대까지 주둔시켜 우리의 전신권을 강점하였다.

한편 전신 전담 관청은 다음과 같이 변화하였다. 1884년 10월 갑신정변으로 중단되었던 우체 사무의 부활을 도모하여 조선전보총국을 전우총국(電郵總局)으로 개칭하였다. 1894년 6월 갑오개혁 때에는 전신 사무를 공무아문(工務衙門)의 전신국과 역체국으로 분리하여 담당하도록 하였다. 1895년 3월 관제 개혁 시 농상공부(農商工部)통신국(通信局)으로 고쳐 전신과 우체 사무를 함께 관장하게 하였다. 1896년 7월 「전보사관제(電報司官制)」를 제정하고 국내 전보 규칙을 보강하는 등 전신 업무의 재출발을 시도하였다. 1900년 봄에는 통신국을 폐지하고 통신원(通信院)을 설치하였다. 그리하여 전신 사업은 1904년 초 전보사 33개소, 전화소 4개소로 발전을 보게 되었다.

1905년(광무 9) 4월 일본은 이른바 「한일통신협정」을 강제로 체결하고 통신 기관의 위탁 경영이라는 미명 아래 통신권을 강탈하였다. 그 후 일제는 본국 체신성에서 직할하던 통신 기관 및 군대에서 관장하던 것을 모두 합쳐 통감부통신국으로 일원화하여 관장토록 하였다. 1910년 국권을 강탈당한 뒤 전신 사업은 일제의 대륙 침략과 식민지 정책 수행을 위한 보조 수단으로 전락하였다.

참고문헌

  • 『전보장정(電報章程)』
  • 『각사등록(各司謄錄)』
  • 전기통신공사 編, 『한국전기통신100년사』, 체신부, 1985.
  • 정기천, 「근대 전기통신 도입의 사상적 배경과 삼로 전신선의 가설」, 성균관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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