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화(楮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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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말에서 조선초기에 관에서 저지(楮紙)로 만들어 유통시킨 명목화폐.

개설

고려시대에 관에서는 화폐를 발행하여 교환수단을 제공하고 재정 확충을 도모하려고 했으나 고려중기에 제작한 동전은 제대로 유통되지 않았다. 고액 화폐였던 은병(銀甁)도 시장에서 유통되지 않자 새로운 형태의 화폐를 만들려고 계획하고 있었다. 이에 고려말에 이르러 저화를 발행하려는 시도가 1391년(고려 공양왕 3)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유통질서를 바로잡기 위해서는 관이 공인하는 화폐의 유통이 시급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원간섭기에 원나라 지폐였던 지원보초(至元寶鈔)나 중통보초(中統寶鈔)를 사용한 경험이 있어 저화 발행을 논의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저화 유통은 고려말의 정치적 문제로 인해 보류되었다.

저화가 본격적으로 발행된 것은 조선시대에 들어서였다. 1401년(태종 1)에 관에서는 사섬서(司贍署)를 세워 저화 유통을 담당하도록 했다. 현물화폐로 사용한 쌀과 면포 등은 생산하는 데 한계가 있고 화폐로 사용하기 어려운 점이 많았지만 저화는 제작도 수월하고 가치만 국가에서 제대로 보장해준다면 비교적 제한 없이 발행하여 화폐로 활용할 수 있었다. 태종대에는 2천 장의 저화를 만들어 관리들의 녹봉으로 나누어주도록 하는 등 저화 사용을 장려하였다. 그러나 저화는 계획대로 원활하게 유통되지 못했다. 유통 부진은 가격 하락으로 이어졌는데, 1419년(세종 1)에는 저화 한 장이 쌀 3두에서 1422년(세종 4)에는 저화 한 장의 가격이 쌀 1두로 점점 하락하였다. 이에 조선통보(朝鮮通寶)와 같은 동전을 제작하여 저화와 같이 사용되도록 하여 가치를 유지하려고 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이후 1492년(성종 23) 조정에서 이루어진 논의를 보면, 정부에서 일찍이 저화 통용의 법을 세웠으나 지켜지지 않은 현실과 심지어 지방에서는 저화의 존재 자체를 모른다는 의논이 있는 것으로 보아, 조선중기에 이르러 저화는 거의 교환수단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한 것으로 보인다(『성종실록』 23년 11월 7일).

연원 및 변천

저화는 고려말인 1391년(고려 공양왕 3)에 처음 등장하였다. 당시 도평의사사의 결의로 자섬저화고(資贍楮貨庫)를 설치하고 저화를 발행했는데, 이는 조선 건국 주도세력이 새 왕조 창건을 위한 재정 기반을 마련하고자 추진한 정책이었다. 당시 정부는 강제로 금·은·포화(布貨)를 거둬들이고 저화를 내줌으로써, 고려의 주요 정치세력이었던 권문세가의 재산을 빼앗고 재정을 확충하려고 했다. 이후 조선초기에는 고려의 정책을 그대로 계승하여 태종대에 저화를 유통시키려는 정책을 실시하였다. 당시 저화 한 장의 가치는 상오승포(常五升布) 한 필 혹은 쌀 2두로 책정하였다(『태종실록』 2년 1월 9일). 상오승포는 품질이 중간 등급의 베이다. 국가에서는 저화를 유통시키려는 노력을 기울였지만 잘 이뤄지지 못해 관에서는 저화를 쌀로 매수하여 저화의 신용도를 증가시키려고 노력하였다. 또한 민간에는 저화통행법(楮貨通行法)을 발행하여 저화를 절반씩 사용하도록 했으며 저화 수납을 거부하는 경우 법으로 처리하여 저화 유통을 강제하였다.

이러한 방책에도 불구하고 민간에서는 면포와 쌀과 같은 현물화폐만 사용하자, 1402년(태종 2) 5월 1일을 기준으로 서울에서 오승포(五升布)를 쓰지 못하게 금지하여 저화유통을 장려하였다. 이러한 금지책을 어길 때에는 직첩이 없는 무직자(無職者)는 가산(家産)을 몰수하고 유직자는 직첩을 거두고 법률에 따라 장형에 처하는 처벌 규정도 마련하였다(『태종실록』 2년 5월 24일). 하지만 민간에서는 저화보다 비단, 무명 등의 포(布)가 더 활발하게 유통되었다. 관에서는 포와 저화를 병행하라고 명령을 내렸지만 저화는 거의 사용되지 않아 폐지된 것과 같은 지경에 이르기도 했다. 이후 1410년(태종 10)에 저화를 유통시키기로 다시 결정하여 추포(麤布)와 저화를 병용하도록 했다(『태종실록』 10년 7월 1일). 추포는 당시 시전에서 유통 수단으로 사용된 포화의 한 종류로 발이 굵고 거칠게 짠 베를 말한다. 그러나 추포와 병용시키자 저화는 유통이 지체되었고, 관에서는 다시 저화만 유통시키는 법안을 발효하여 저화의 유통을 장려했다. 세금으로 내는 모든 포를 저화로 전환시켜 납부하도록 하여 이전보다 더욱 강력한 유통책을 시행하였다. 또한 저화를 사용하지 않을 경우 3일 동안 거리에 세워 여러 사람에게 보이고, 장(杖) 100대를 때리고, 저화 30장(張)을 징수하게 하여 유통을 독려했다. 저화의 화폐가치를 보증해줄 수 있는 화매소(和賣所)를 개경과 서울에 설치하여 언제든지 호환될 수 있다는 가치 보증을 해주기도 했다(『태종실록』 10년 10월 24일).

이 밖에도 저화를 널리 유통시키기 위한 제도가 병행되었다. 우선 세금으로 저화를 내도록 하였는데 장사치들이 바치는 세금을 한 달에 저화 한 장으로 정하여 상인들 사이에서 저화 유통을 장려하였고, 속전(贖錢)을 저화로 강제하기도 했다. 그러나 저화의 실질가치가 없었던 만큼 국가에서 발행한 양만큼 현물로 보장해주는 제도가 마련이 되어야 했는데 제도적으로 뒷받침되지 못했고 결국 저화는 원활하게 유통되지 못하고 사라졌다.

형태

저화는 저주지(楮注紙), 저상지(楮常紙)로 만든 두 종류가 있다. 저주지로 만든 저화는 길이가 1자 6치(약 48㎝), 너비 1자 4치(약 42㎝)이고, 저상지로 만든 저화는 길이 1자 1치(약 33㎝), 너비가 1자(약 30㎝) 이상이었다. 저화에는 발행 사항과 발행 연도 등을 담은 ‘삼사신판저화(三司申判楮貨)’, ‘건문연간소조저화(建文年間所造楮貨)’라는 인문(印文)을 찍어 관에서 발행했다는 표지로 삼았다. 저화의 규격은 일정하게 정해져 있었으나 제작하는 종이가 전국에서 상납되어 지역에 따라 두께와 품질이 동일하지 않았다. 이와 같은 문제를 해결하고자 저화를 전국에서 상납하지 않고 서울의 한곳에서 제작하는 방식을 취해 일정한 품질이 유지하도록 변경하기도 했다(『태종실록』 12년 2월 15일). 의정부의 보고에 따르면 조선의 저화는 대체로 중국의 지폐인 보초(寶鈔)를 본떠 만들었으나 그 두께는 보초보다 두꺼웠던 듯하다. 보초가 얇고 부드러워 사용자가 휴대하기 편한 반면, 저화는 두껍고 뻣뻣하여 접거나 닳으면 사용하지 않는다고 하였다(『태종실록』 13년 10월 21일).

저화는 종이로 만들었기 때문에 시장에서 사용될 경우 훼손이 훨씬 쉽게 될 수밖에 없었다. 액면가에 따라 저화의 가치는 변함이 없는 것이 원칙이었지만 시인(市人)들뿐만 아니라 비록 관리라 하더라도 그 좋고 나쁜 것을 가린다 하니, 사헌부·형조·한성부에서 저화의 형태와 품질에 따라 가려 받는 행위를 철저히 금지하기도 했다(『태종실록』 11년 6월 21일).

생활·민속 관련 사항

저화 사용을 법으로 강제하면서 민간에서 저화를 사용하기는 했지만, 교환수단으로 사용하기에는 상당히 높은 가격이었다. 이에 관에서는 민간의 현실을 반영하여 저화 외에 동전을 만들어 병용하는 방안을 계획하여 백성들의 편의를 도모하기도 했다. 그러나 저화의 가치가 안정적으로 유지되지 못했기 때문에 민간에서 저화는 관에서 강제한 내역 외에는 거의 거래되지 않는 현상이 지속되었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권인혁, 「조선초기 화폐유통연구」, 『역사교육』32, 역사교육연구회, 1982.
  • 박평식, 「조선초기의 화폐정책과 포화유통」, 『동방학지』158,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2012.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