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부(立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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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마의 모습이 서 있는 것 같은 한 칸짜리 가마.

개설

입부(立釜)는 길이가 긴 와부(臥釜)와 달리 사발을 엎어놓은 모습의 한 칸짜리 가마이다. 모습이 만두와 닮았다 하여 만두요(饅頭窯)라고 불리기도 하며, 가마가 서 있는 모습과 불이 치솟는 방식을 본떠 입요(立窯)라고도 한다. 주로 중국에서 당나라 이후에 사용되었다.

내용 및 특징

입부는 그릇이 구워지는 공간이 1개인 구조여서 단실요(單室窯)라고도 불린다. 또 겉모습이 만두와 같이 생겼다는 의미에서 만두요, 포자요(包子窯), 혹은 평면 모양이 말발굽과 같은 모양이라고 하여 마제형요(馬蹄形窯)라고도 불린다. 중국 중부와 북부 지방의 자기 생산지에서 주로 활용되었다.

입부는 아궁이 앞쪽에 자리하는 출입 시설인 요문(窯門), 연료를 넣는 아궁이, 그릇을 쌓는 요실(窯室), 배연을 위한 연통과 호장(護牆)의 다섯 부분으로 구성된다. 주로 벽돌을 이용하여 만들었으며, 갑발과 갑발 받침 등의 요도구도 가마를 구축하는 데 부분적으로 사용되었다. 입부의 요문 앞에는 통풍구를 마련하여 가마 내부의 연소가 효과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도록 했다. 가마 주변에 자리한 호장은 폐기된 요도구와 흙으로 쌓아 만든 낮은 담으로 가마를 보호하고 온기를 유지시켜 주는 기능을 하였다.

중국의 중부와 북부 지방은 석탄 매장량이 높아서 입부를 사용하는 가마들에서는 자기 제작에 화목과 함께 석탄을 사용하였다.

조선시대에 입부로 지칭된 입요는 도염식(倒焰式) 가마이다. 도염식 가마는 내부의 화염이 아궁이를 통해 요실로 올라가며 가마 벽을 따라 둥근 천장을 지나 요실 뒤쪽에 마련된 바닥의 구멍을 통해 연통으로 휘돌아 나간다. 입부는 열효율이 우수하여 가마 안의 불길이 비교적 고르게 흐르는 장점이 있다.

변천

조선의 자기 가마는 대부분 긴 터널 형태의 등요(登窯)이다. 그러나 중국은 등요와 함께 조선시대에 입부로 불린 입요를 이용하여 자기를 제작했다. 1493년(성종 24)에 중국의 사정을 접한 사옹원(司饔院) 제조(提調)유자광(柳子光)은 왕에게 등요인 와부의 약점을 설명하고 그것의 대안으로 중국식 입부의 도입을 건의하였다(『성종실록』 24년 5월 18일). 왕은 와부와 입부의 모형을 통해 각 가마의 특성을 보고받은 다음에 새로운 형태의 가마를 실험하도록 허락했다. 그러나 유자광의 건의에도 불구하고 조선시대 관요의 백자 생산에 입부를 적극적으로 도입하는 것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1493년에 유자광에게 중국의 입부 기술을 전달해준 오신손(吳愼孫)은 도화서의 화원(畵員)이었던 것으로 여겨진다(『성종실록』 3년 5월 10일). 오신손은 중국으로 가는 사신단에 화원으로 참여하였을 것이다. 사신단에 배속된 화원은 사행 중에 보고 들은 바를 기록하는 임무도 수행했다. 오신손은 중국에서 백자를 제작하는 방식과 특징을 파악하여 사옹원 제조였던 유자광에게 전했을 것이다.

사신단이 지나는 길은 주로 중국의 북쪽에 해당하므로 오신손이 직접 보았거나 간접적으로 들었던 사실들은 북중국의 상황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입부라고 지칭된 입요는 주로 중국의 중부와 북부 지방에서 활용된 가마 형식이다. 반면에 절강성 이남에서 이루어지는 요업의 중심은 와부라 지칭된 와요(臥窯)로 등요였다.

참고문헌

  • 강경숙, 『한국 도자기 가마터 연구』, 시공사, 2005.
  • 방병선, 『중국도자사 연구』, 경인문화사, 2012.
  • 웅해당 지음, 김재열 옮김, 『동아시아 요업기술 발전과 교류사 연구』, 학연문화사, 2014.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