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밀대(乙密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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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의 대동강을 바라보는 금수산(錦繡山)에 수축되었던 산성의 장대(將臺).

개설

을밀대(乙密臺)는 고구려의 을밀선인(乙密仙人)이 그곳에서 도를 수행했다는 전래설에서 유래되었다. 최치원에 의하면, 선인은 단군 이래로 선도(仙道)를 수행했다는 사람을 말한다. 예컨대 신라의 국선(國仙)도 을밀선인과 같은 선인이라고 했다. 따라서 을밀대는 삼국시대부터 존재하던 장소였으며, 고구려인의 종교적, 사상적 구도 장소였다. 조선시대에는 대동강을 바라보며 평양 성내를 보호하는 군사 거점인 북성(北城)의 장대였다. 주변의 산세와 대동강을 조망할 수 있기 때문에 명승지로도 유명했다.

위치 및 용도

평양의 금수산 꼭대기에 있는 평평한 지형의 넓은 공간이다. 을밀대 아래 층안(層岸)의 위에는 대동강을 전망하는 부벽루(浮碧樓)가 있다[『세종실록』 지리지 평안도]). 또한 평양의 내성(內城)을 보호하는 산성인 북성의 장대로, 대동강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요지로서 구한말까지 군사 지휘소로 이용되었다.

변천 및 현황

『평양속지(平壤續誌)』에 의하면, 1714년(숙종 40)에 평양감사민진원(閔鎭遠)이 북성 1,318보(步)를 처음 축조했다. 당시 북성이 을밀대의 서북쪽 모퉁이로부터 모란봉(牧丹峯)을 두르고 부벽루를 지나 내성의 동암문(東暗門)에 닿는다고 했다. 민진원이 북성을 축조한 것은 내성의 북쪽에 위치한 모란봉을 상대하기 위해서였다. 외적이 모란봉을 점령하면 내성을 내려다볼 수 있었으므로 이를 방어하는 차원에서 북성을 쌓았다.

일제강점기에는 주요 사적지로 지정되었으며, 을밀대 옆에 평양부립(平壤府立) 낙랑박물관(樂浪博物館)이 건축되었다.

형태

을밀대는 구릉 위에 사방이 평평한 지형을 말하는 것이나 건물을 세운 이후부터는 지명이나 공간의 의미보다는 누정(樓亭)과 대(臺)를 의미하였다. 누정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단층이다. 고구려 시대부터 존재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현재의 누정은 1714년에 성벽을 보강할 때 재건한 것이다. 누정은 사방을 조망할 수 있도록 기둥만 세워져 있다. 누정의 기둥은 짧은 석주(石柱)와 목주(木柱)로 만들어졌다. 대의 주변에는 총각을 설치해서 화기를 사용할 수 있다. 특히 대 주변의 석축은 지상에서 90도에 가깝게 만들어져 적의 침입이 불가능하게 하였다.

관련사건 및 일화

을밀대와 모란봉 사이에는 고구려 동명왕(東明王)의 구제궁(九梯宮) 궁궐터로 전해지는 영명사(永明寺)가 있다. 또한 을밀대 옆에 동명왕과 연관된 기린굴(麒麟窟)이 있었다고 전한다. 기린굴 남쪽 백은탄(白銀灘)에 바위가 있는데 조천석(朝天石)이라 했다. 동명왕이 기린을 타고 나와 조천석에 올라서 천상(天上)에 주사(奏事)하였다고 한다. 동명왕과 관련된 내용들은 사실 확인이 되지 않지만 그런 전승 일화를 통해 을밀대가 평양에서 중요한 지점에 위치했음을 알 수 있다[『세종실록』 지리지 평안도].

을밀대 인근에는 조명관계와 밀접한 사적이 있다. 조선전기 명나라 사신이 평양에 도착하면 기자묘(箕子墓)를 배알했다. 기자묘는 을밀대 아래에 있었으며 그 앞에 정자각(丁字閣)과 중수기적비(重修記蹟碑)가 있었다. 1102년(고려 숙종 7)에 기자묘의 분형(墳形)을 찾아 제사를 지냈다. 성종은 기자묘의 연원을 조사시키기도 했고(『성종실록』 4년 4월 18일), 이후 조선말기까지 기자묘를 관리했다.

현재 을밀대에 위치한 건물의 편액은 19세기 말 평양에서 출생한 호정(湖亭)노원상(盧元相)의 글씨이다. 그는 1928년에 사망할 때까지 평양의 대표적인 서예가로 활동했다.

을밀대 인근은 임진왜란과 청일전쟁 당시 중국군과 일본군의 주요 격전지 중의 하나였다. 특히 청일전쟁기에 일본군이 현무문을 통해 을밀대를 비롯한 산성의 주요 거점을 장악했다고 하여 일본인 사이에서 주요 명승지로 꼽히기도 했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 『평양속지(平壤續誌)』
  • 『여지도서(輿地圖書)』
  • 『동아일보』, 1926년 9월14일.
  • 『매일신보』, 1905년 8월11일.
  • 『삼천리』제8권 제4호, 1936년 4월 1일 ‘檀君陵’
  • 『황성신문』, 1908년 2월 14일.
  • 강명숙, 「한일합병 이전 일본인들의 평양 침투」, 『국사관논총』 107, 2005.
  • 小泉顯夫, 「第六 平壤萬壽臺及其附近の建築物址」, 『昭和十二年度古蹟調査報告』, 1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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