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동(倭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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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후반부터 일본의 쓰시마로부터 상평통보를 제조하기 위해 조선에서 수입한 구리.

개설

고대부터 구리는 일상생활에서뿐만 아니라 각종 제기와 무기의 원료로 사용되는 귀금속이었다. 우리나라에서도 고대부터 구리를 생산하여 무기와 제기의 원료로 활용하였다. 특히 17세기에 상평통보를 주조하여 전국적인 유통을 시작하면서 구리 사용량이 급격히 증가하였다. 이에 조선에서는 경상도의 조세 대부분을 동래의 왜관으로 보내어 쓰시마에서 구리를 수입하는 데에 충당하도록 하였다. 당시 수입한 구리를 왜동이라 하였다. 왜동 거래는 일종의 물물교환으로 성사되었는데, 조선에서는 쓰시마에 필요한 면포와 쌀을 내어주는 대신 일본으로부터 구리를 들여왔다. 상평통보가 주조된 1678년(숙종 4) 당시 왜동의 가격은 은으로 환산할 경우 구리 100근당 은 20냥 선에서 거래가 되었다.

연원 및 변천

조선초기부터 구리는 효용이 높아 일본으로부터 수입하고 있었다. 당시 왜동 거래에 면포가 사용되었는데, 유출량이 지나치게 많아서 관에서 왜동 수입을 법으로 금지하기도 하였다(『연산군일기』 5년 1월 15일). 당시까지만 해도 조선에서 구리는 생활용품과 무기 외에 수요가 많지 않았고, 일본에서도 구리의 생산량이 많지 않아 무역 규모가 크지 않았다. 그러나 17세기 조선에서 국가적으로 상평통보를 대량 주전하기 시작하면서 대일본 구리 무역량은 크게 증가하였다.

상평통보는 본격적으로 유통되기 시작한 이후 1678~97년 사이에 450만 냥이 주전되었다. 이후 약 30여 년간 주전이 중단되고 다시 주전되기 시작한 1731부터 1800년까지는 500만 냥 이상의 동전이 만들어졌다. 1894년(고종 31) 근대 화폐가 제작되기까지 제작된 상평통보의 총량은 1,300~1,500만 냥에 달했다. 상평통보의 구리 함량을 감안하더라도 적어도 총 30~40만 톤의 구리가 상평통보를 제작하는 데 소비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전근대시기 구리 생산은 지표면에 노출된 광석을 녹여 구리를 추출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마저도 충분하게 존재하지 않아 조선에서는 외부로부터 수입하여 수요에 충당해야 했다. 당시 조선에서 상평통보의 재료인 구리가 생산되던 지역은 경기도 이천, 함경도 안변과 황해도 수안이었다. 강원도 회양에서는 구리와 함께 주전의 주요한 재료로 사용되었던 납을 생산하기도 했다. 특히 안변에서 생산되는 구리는 매장된 위치가 깊지 않아 채굴이 비교적 수월했다고 한다. 이에 안변의 구리 생산비용이 상대적으로 적게 들어갔고 운반비용 또한 왜동보다 저렴하여 채굴 가능성과 채산성을 높게 평가하기도 했다. 그러나 조선후기 증가한 상평통보의 주전량을 감당할 수 있을 정도의 양이 생산된 것은 아니었다. 결국 조선에서는 왜로부터 구리를 수입하여야 했다.

이에 비하여 일본에서는 1696~1710년 사이에 최대 구리 생산량을 기록하고 있었다. 일본 국내에 1703년을 기준으로 243개의 구리광산이 등록되었고, 1678년에는 900만 근 이상을 수출하였다. 구리 수요는 일본 내에서도 상당하였지만 조선을 비롯한 중국 그리고 유럽까지 크게 증가하여 수출량도 생산량 증가에 비례하고 있었다. 1696~1710년 사이에 중국으로 수출된 양은 매년 400~700만 근, 2,400~4,200톤 정도로 추산할 수 있다. 조선에서 수입한 양도 이 시기에 가장 많았으며 1697년(숙종 23)에는 140만 근까지 치솟고 있었다.

조선에서 왜동을 구입하는 대가로 치른 것은 면포와 쌀이었는데 쓰시마의 지형적 특성상 식량과 면포를 자급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조선에서는 1651년(효종 2)부터 수입의 결제 수단이던 면포인 공목(公木)의 일부를 1필에 쌀 12두로 환산하여 지급하기 시작했다. 면포보다는 쌀의 공급이 더 절실했기 때문이다. 조선에서도 왜동을 확보하기 위해 면포에 해당하는 쌀의 양을 조선의 물가가 아닌 일본 내지의 물가에 맞추어서 후하게 지급하였고 이러한 무역을 통해 상평통보를 주전하기 위한 구리를 확보해나가고 있었다.

형태

일본에서 수출하는 구리는 특정한 형태를 띠고 있었다. 수출하는 구리를 시각적으로 구분하여 수출량을 통제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당시 일본에서 조선 및 중국에 수출한 구리를 ‘어용동(御用銅)’이라 불렀는데, 수출용 구리는 내수용 구리와 달리 긴 막대 형태로 제련하여 주조하였다. 또한 긴 노 형태에서 유래하여 수출용 구리를 ‘도동(棹銅)’이라 불렀는데, 도동은 약 7~8촌(22~24㎝) 길이로 상자에 100근 단위로 포장하여 수출하였다. 외형을 조절하여 불법적으로 유출되는 것을 막고자 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당시 일본에서는 네 곳의 항구에서만 무역을 허용하여 과도한 구리의 수출을 제한하고 있었다. 왜동을 특정한 형태로 제련하여 각 항에 수송하면 수출용 구리를 구분할 수 있었다. 조선에 들어오는 왜동도 오사카[大阪]에서 일괄적으로 제련하여 쓰시마로 이송되었으므로 도동의 형태를 띠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생활·민속 관련 사항

왜동은 대부분 관의 주전 사업에 투입되었지만 공물 납부에 대한 대가로 공인(貢人)에게 지급되기도 하는 등 민간으로 흘러들어 가서 활용되기도 했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제전통고(制錢通考)』
  • 田代和生, 『近世日朝交通貿易史の硏究,』, 倉文社, 1981.
  • 小葉田淳, 『日本銅鉱業史の研究』, 思文閣出版, 1993.
  • Ryuto Shimada, 『The Intra-Asian trade in Japanese copper by the Dutch East India company during the eightenth centurybid』, Brill, 2006.
  • 유현재, 「16세기 주전정책과 재정활용」,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4.
  • 이헌창, 「1678~1865년간 화폐량과 화폐가치의 추이」, 『경제사학』27, 1999.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