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경당(演慶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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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 후원 내 별당으로 지어진 상류 주택 형태의 건물.

개설

연경당은 1827년(순조 27) 대리청정을 맡은 효명세자(孝明世子)가 순조와 중전의 존호를 올리는 의식을 거행하면서 지은 건물이다. 경사스런 의례를 기념하여 건물 이름을 연경이라 했다고 『한경지략(漢京識略)』에 밝혔다. 이때 지어진 건물은 ㄷ자 형태였다. 이후 한동안 익종(翼宗)이란 추존 묘호를 받은 효명세자의 초상화를 봉안하다가 1865년(고종 2) 본채와 내당, 서재를 갖춘 사대부 주택과 같은 지금의 형태로 고친 것으로 보인다.

건물이 완성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경복궁 중건이 이루어지고, 왕이 경복궁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거의 활용되지 못하였다. 1880년(고종 17)대 이후에 잠시 왕이 외국 사신을 접견하는 데 쓰였다(『고종실록』 31년 5월 10일). 19세기 상류 주택의 세련된 외관이 잘 갖추어진 건물로 평가된다.

위치 및 용도

창덕궁 후원 중심부, 주합루(宙合樓)의 높은 언덕 뒤편에 있으며 후원 내에서도 한적하고 조용한 곳에 자리하고 있다. 연경당이 있는 곳에는 본래 왕실의 글씨나 그림을 보관하던 진장각(珍藏閣)이 있었다.

1828년(순조 28)에 중전 탄신 40주년을 맞아 이 건물에서 연회가 벌어졌다. 헌종이 즉위한 후 효명세자를 익종으로 추존하고 연경당에 익종의 어진을 봉안하여 절기마다 제사를 지내기도 했다. 그러나 연경당 주변이 습기가 많아서 1842년(철종 8) 익종 어진은 창덕궁 서쪽 대유재(大酉齋)로 옮겨졌고 연경당은 빈 집이 되었다.

퇴락했던 연경당은 1865년 크게 수리했는데, 이때 사대부 살림집 형태로 개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고종은 12세 나이로 즉위하여 조만간 왕비를 맞을 시점에 있었다. 연경당이 완성된 이듬해인 1866년(고종 3)에 민치록(閔致祿)의 딸을 왕비로 맞은 것으로 보아, 연경당을 살림집 형태로 고쳐 지은 목적은 혼례를 올릴 나이 어린 왕과 왕비가 한적하게 지낼 별당으로 쓰려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연경당 개축 공사가 완성되던 1865년 4월에 경복궁 중건 계획이 공포되고 1868년(고종 5)에는 왕이 경복궁으로 거처를 옮겼다. 따라서 실제 연경당은 거의 활용되지 못했다고 짐작된다.

고종은 1876년(고종 13) 경복궁에 화재가 발생하자 거처를 창덕궁으로 옮겼다. 이후 두 궁을 자주 오갔으며 창덕궁에 거처할 때 이따금 연경당에서 신하들을 만나기도 하였다. 1883년(고종 20)에는 연경당에서 동래부사(東萊府使)를 접견하였으며 이듬해에 여기서 유생들의 과거시험을 치렀다. 1894년(고종 31)에는 이곳에서 미국 공사를 만났고 1908년(융희 2)에는 순종이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을 접견하기도 하였다(『순종실록』 1년 4월 21일).

변천 및 현황

「동궐도(東闕圖)」를 보면, 불로문을 지나면 왼쪽에 효명세자가 독서하던 의두합(儀斗閤)이 있고 오른쪽에는 크고 작은 연지가 있으며 두 연지 사이에 어수당(魚水堂)이 있다. 큰 연지 건너편 못가에는 애련정(愛蓮亭)이 있다. 여기서 더 나아간 곳에 연경당 일곽이 그려져 있다.

연경당과 인근의 의두합은 모두 효명세자가 대리청정하면서 지은 건물이다. 건물을 짓고 몇 년 지나지 않아 효명세자가 세상을 떠났다. 1834년(헌종 즉위) 효명세자가 익종으로 추존되면서 효명세자 부인은 왕대비가 되었다. 통칭 조대비(趙大妃)로 불린 대비는 30여 년을 궁에서 지내다가 철종이 후사 없이 승하하자, 흥선군(興宣君)의 차남을 왕위에 앉혔는데 그가 고종이다.

고종이 즉위할 때 왕실의 최고 어른이 된 조대비는 고종 즉위 1년 되던 해에 남편의 추억이 깃든 연경당과 의두합을 전면 수리하기에 이르렀다. 공사는 이듬해 봄에 완성되었으며 공역을 책임 맡았던 관리들에게 표범 가죽을 하사하고 감독관 이하 장인들에게도 상을 내렸다.

수리 이후 연경당 건물은 큰 변모 없이 지금에 이르고 있다. 다만 의두합의 전면이 깎이고 출입문인 금마문(金馬門)이 개조되는 변화가 있었는데, 이는 자동차가 연경당 앞까지 들어올 수 있도록 길을 닦고 문을 넓힌 결과이다.

형태

1827년에 지었던 연경당의 형태는 「동궐도」나 1828년 연경당에서 왕비의 생신을 축하하는 연회를 벌이면서 그 절차를 기록한 『진작의궤(進爵儀軌)』에 상세히 나타나 있다. 연경당은 ㄷ자 형태의 본채를 가지고 있으며 주변은 담장으로 둘렀고 동쪽에 앞뒤로 一자형의 긴 건물이 마주하고 있다. 뒤쪽에 있는 건물은 개금재(開錦齋)이고 앞은 운회헌(雲繪軒)이다. 본채는 가운데 대청을 중심으로 동온돌과 서온돌이 대청 앞쪽으로 돌출해 있다. 진작연이 거행될 때 마당에는 임시 무대가 설치되고 대청 안에는 순원왕후(純元王后) 등이 앉아서 공연을 관람했다. ㄷ자 형태 건물은 이러한 공연을 효과적으로 치르는 데 적합했다.

1865년에 고쳐진 연경당은 19세기 도성의 상류층 주택과 유사한 모습이다. 「동궐도형(東闕圖形)」에 전체 건물 평면이 묘사되어 있고 『궁궐지』에는 건물 규모가 명시되어 있다. 즉 본채가 14칸, 내당 10칸 반, 선향재 14칸, 북행각 14칸 반, 서행각 20칸, 남행각 21칸, 외행각 25칸, 수궁(守宮) 15칸, 또 다른 수궁 16칸이다. 수궁은 담장 밖에 있으므로 이 부분을 제외하더라도 전체 규모가 100칸에 가깝다.

연경당 공간은 크게 세 개의 영역으로 나눠지며 각 영역은 독립된 마당을 갖추었다. 우선 제일 아래쪽에 대문과 좌우 행랑으로 둘러싸인 행랑 마당이 있고 그 안쪽 동편에 본채 앞으로 가장 넓은 마당이 있으며 서편에도 내당 앞마당이 마련되어 있다. 이것은 상류 주택의 행랑 마당, 사랑 마당, 안마당에 해당된다.

정문인 장락문(長樂門)은 솟을대문 형태이며 문 좌우에는 하인들이 머물 수 있는 방과 마구간을 마련한 행각이 있다. 마당 뒤쪽에 두 개의 출입문이 있는데 오른쪽 문이 장양문(長陽門), 왼쪽이 수인문(修仁門)이다. 장양문과 수인문을 들어서면 각각의 넓은 마당이 나오고 두 마당은 낮은 담장으로 구획되어 있다.

본채 건물과 내당은 지붕이 연결된 一자형 긴 건물이며 본채 쪽이 한 칸 정도 앞으로 나와 있다. 연경당이라는 당호는 본채에 달려 있다. 본채는 정면 6칸 측면 2칸 규모이고 대청 2칸에 온돌방 2칸이 나란히 있으며 대청 동쪽 한 칸을 누마루로 꾸몄다. 내당은 정면 6칸, 측면 2칸을 기본으로 하면서 서쪽 끝 한 칸은 돌출되어 있다. 본채와 내당은 민가의 사랑채, 안채와 유사한 구성이다. 본채는 장대석을 3단 정도 쌓아 올린 기단 위에 네모기둥을 세우고 기둥머리에 아무 장식을 하지 않았으며 네모난 도리를 올려 서까래를 받도록 한 간단한 구조이며 처마도 부연을 쓰지 않은 홑처마이다. 궁궐 안에 지었지만 민가의 소박한 구조를 본떠서 지었다. 다만 누마루의 경우에는 잘 다듬은 높은 장초석을 세웠고 창문에는 가는 창살이 기하학적 무늬를 이뤄 정교하고 세련된 모습이다.

본채 동편에는 직각 방향으로 또 한 채의 긴 건물이 있는데, 서재인 선향재(善香齋)이다. 사랑채 곁에 서재를 별도로 두는 것은 조선시대 고위 신분의 저택에서 볼 수 있는 특징이다. 선향재는 정면 7칸 규모이며, 가운데 3칸의 넓은 대청을 두고 좌우에 온돌이 있으며 좌우 양 끝 방은 책을 보관하는 방으로 쓰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건물의 좌우 측면 벽체는 붉은 벽돌을 지붕 높이까지 쌓아 올리고 벽 중앙에는 둥글게 문양을 넣었다. 건물이 서향이기 때문에 오후의 햇살을 피하기 위해 처마에 접이식 차양을 설치했다.

선향재 뒤에는 좁은 언덕이 있고 장대석으로 꾸민 화계를 갖추었다. 후원 북쪽 끝에 사방 1칸 크기의 농수정(濃繡亭)이라는 작은 정자를 두었다. 내당 뒤에는 음식을 준비하는 반빗간이 있다. 보통 민가에서는 안채에 부엌이 딸리게 마련이지만 여기서는 반빗간을 별도로 뒤에 두었다. 전체적으로 19세기 서울의 사대부 집과 유사한 분위기를 갖추었지만 세부가 더 정교하며 마당의 구성이나 서재, 정자 등을 둔 구성이 한층 세련된 모습이다.

관련사건 및 일화

1846년(헌종 12) 비변사(備邊司)에서는 당시 관청에서 요구하는 물품을 납부하거나 잡다한 공역을 책임 맡는 공인(貢人)들이 일의 대가를 제대로 받지 못하는 실정을 논의하였다. 이때 1827년 연경당을 짓는 일을 맡았던 자문군계(紫門軍契)의 공인들이 공사 대금이 10,000냥이나 들어갔으나 3,000냥밖에 받지 못하여 어려움에 처해 있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당시에는 궁궐 내 전각을 짓는 데도 공인들이 일을 맡아 수행했음을 알 수 있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일성록(日省錄)』
  • 『진작의궤(進爵儀軌)』
  • 주남철, 『연경당』, 일지사, 2003.
  • 허영일 편, 『순조조 연경당 진작례』, 민속원, 2009.
  • 김동욱, 「고종2년의 연경당 수리에 대해서」, 『건축역사연구』제13권 제1호, 2004.
  • 주남철, 「효명세자 영건기록에 관한 연구」, 『대한건축학회 논문집: 계획계』제21권 제10호,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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