쇄권색(刷卷色)

sillok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중앙 각사에서 쓰는 재정 지출을 감사하기 위하여 설치한 기관.

개설

쇄권색은 1409년(태종 9) 4월 설치된 기구였다(『태종실록』 9년 4월 19일). 쇄권색에서는 각사(各司)에서 쓴 경비를 감사하여 손실된 전곡(錢穀)이 있을 때 이를 담당 관리에게서 징수하였다. 즉, 관리들의 낭비를 경계할 목적으로 설치되었다. 하지만 관리들의 단순한 문자 착오라든지 쥐가 파먹은 것과 같은 부득이한 이유로 전곡이 손실되었을 때에도 관리에게 추징하는 문제점이 발생하였다. 이로 인해 손실된 전곡의 추징은 쇄권색 설치 이후의 것에 한하여 적용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쇄권색에 대한 기록이 이후에 나타나지 않는 것으로 보아 한시적으로 운영된 기구로 짐작된다.

담당 직무

조선왕조 건국 후 전곡의 출납과 회계에 관한 사무는 고려시대 때처럼 삼사에서 관장하였고, 이에 대한 감찰은 매월 사헌부 감찰(監察)이 하였다. 삼사에서 전곡을 지출할 때에는 도평의사사의 명령에 따라 집행하였다. 그 후 태종대의 개혁으로 도평의사사 중심의 체제가 의정부-육조-각사 체제로 바뀌었다. 그에 따라 1401년(태종 1)부터 삼사를 대신하여 출납 업무는 사평부(司平府)에서 담당하였고, 회계 업무는 호조에서 담당하였다(『태종실록』 1년 7월 13일).

변천

조선초기는 중앙의 각사가 자체의 전곡 수입·지출을 개별적으로 운영하였기 때문에 부정이 생길 수 있는 여지가 많았다. 각사의 관리들은 창고의 전백(錢帛)·미곡(米穀) 등의 물건을 사사로이 출납하여 개인의 창고[私庫]에 저장하기도 하였다. 상전[主典]과 내통·공모하여 물건을 도용하거나 혹은 질 낮은 물건으로 바꾸기도 하였다. 공장(工匠)에게 본사(本司)의 물건을 사사로이 만들게도 하였다. 이처럼 각사의 관인 혼자 부정을 저지르거나, 혹은 각사의 노비와 공장이 공모하여 관물을 도용하거나 남용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국가는 관원들의 낭비 방지와 관물 도용을 사전에 예방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조치를 강구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각 관아의 수입과 지출은 당해 각사에 전적으로 맡겨져 있어서, 출납을 담당하는 사평부도 이를 정확히 파악하기 어려웠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1402년(태종 2) 정월에 전곡의 출납과 회계법을 제정하였다(『태종실록』 2년 1월 16일). 이로써 모든 창고의 출납은 제조가 관장하게 하고, 회계는 사평부에 보고하도록 하였다. 또한 각 관아의 공해전(公廨田)에서 1년 동안 거두어들이는 수입과 해당 관청에 출근하는 관원의 점심, 붓·먹·종이 등으로 필요한 매달 지출을 사평부에 보고하도록 하였다. 1409년 4월에는 각사에서 쓴 경비를 감사하여 손실된 전곡이 있을 때 이를 담당 관리에게서 징수하는 쇄권색을 설치하였다.

세종대에는 쇄권색을 공부상정색(貢賦詳定色)으로 개조하였다(『세종실록』 즉위년 9월 24일).

참고문헌

  • 田川孝三, 『李朝貢納制の硏究』, 東洋文庫, 1964.
  • 박도식, 「조선초기 국가재정의 정비와 공납제 운용」, 『관동사학』 7, 1996.
  • 윤근호, 「조선왕조 회계제도 연구」, 『동양학』 5, 1975.
  • 박도식, 「조선전기 공납제 연구」, 경희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5.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