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모자(小帽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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챙 없이 머리 부분만 덮어 쓰는 감투형의 작은 모자.

개설

『역어유해(譯語類解)』에는 소모자의 한글 명칭을 ‘감토’라고 기록하고 있고, 『사례편람(四禮便覽)』에는 소모(小帽)가 곧 지금의 감두라고 되어 있다. 소모자는 원래 중국의 명나라 때 일반 남자들이 사용하던 쓰개로, 6조각으로 이루어져 육합모(六合帽)·육합일통모(六合一統帽)라고 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낮은 계층의 사람들이 입자(笠子) 대신 사용하였고, 공사(工事)에 참여한 사람들이 사용하기도 하였다. 출토 유물이 15~18세기의 남녀 분묘에서 다수 발견되고 있어 여성이 사용했을 가능성도 있다. 공단·모직·명주·무명·명주 등 다양한 직물을 계절에 맞게 사용하였으며, 안에 솜을 넣은 것도 있다.

연원 및 변천

끝이 뾰족한 꽃잎형 조각 6개를 이어 붙여 머리가 들어갈 부분을 만들고, 밑변에는 머리를 감쌀 수 있도록 5㎝ 내외의 띠를 대어 만들었는데, 드물게 8개를 이어 붙인 것도 있다. 육합모나 육합일통모는 소모자의 형태에서 나온 명칭이다.

조선시대에는 한때 하층 계급의 사람들에게 소모자를 착용하도록 하였으나 다음과 같은 기록으로 보아 잘 시행되지는 못하였던 것 같다. “하인배들의 멸대모(篾大帽)를 금하는 기록 중에 중국의 제도에 따라 하인들은 다 소모자를 쓰게 하고 입자를 쓰는 것을 금할 것을 의논하였으나 시행되지 못하였다.”(『선조실록』 26년 윤11월 22일). “천인과 서인에게 입자 대신 소모자를 쓰도록 했던 앞서의 시책이 실효를 거두지 못하였다.”(『선조실록』 31년 11월 6일)

또한 중국 사람들이 소모자를 판매하는 기록(『광해군일기』 4년 10월 28일)과 색리(色吏)에게 소모자를 준 기록(『광해군일기』 6년 1월 15일)을 보아 우리나라에서도 사용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밖에도 북한성(北漢城) 역사(役事)를 마치는 데 소요된 재력 중 소모자가 900립(立)이라는 기사로 보아 하층 계급의 사람들은 물론 공사에 참여했던 많은 사람이 소모자를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숙종실록』 37년 10월 19일).

조선중기의 출토 복식 중에는 소모자가 많이 있어 서민 남자들이 집 안에서 일상용으로 사용하거나, 상례용으로 사용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17세기 전기에 사망한 해평윤씨(海平尹氏) 문중의 남아 묘에서도 1세 정도 아이의 것으로 추정되는 소모자가 출토됨으로써 문헌에서는 확인되지 않았지만 어린아이들도 사용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어린이용 모자의 형태는 성인용 모자와 거의 비슷하며 6개의 삼각형 조각을 정수리에서 모아 둥글게 잇고, 밑변에는 직사각형의 대륜을 둘렀다. 정수리에는 연봉 매듭이 장식되어 있으며, 턱에 묶는 끈이 달려 있다. 성인용 모자에서는 턱에 묶는 끈은 보이지 않는다.

형태

삼각형 6조각 또는 8조각을 이어 붙여 만들고, 이마 부분에는 대륜을 두른다. 정수리에는 매듭 장식이나 단추 장식이 있고, 끈이 달린 것도 있다. 공단·모직·명주·무명·명주 등 다양한 직물을 계절에 맞게 사용하였으며, 홑이나 겹, 또는 안에 솜을 둔 것도 있다. 아청색이나 쪽빛이 남아 있는 유물이 다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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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도

일상용과 상례용으로 폭넓게 사용되었다.

참고문헌

  • 국립민속박물관 편, 『오백년의 침묵, 그리고 환생 : 원주변씨 출토유물 기증전』, 국립민속박물관, 2001.
  • 김은정·강순제, 「감투에 관한 연구」, 『복식(服飾)』제57권 6호, 2007.
  • 단국대학교석주선기념박물관, 『남아 미라 및 출토유물 연구논총』, 단국대학교석주선기념박물관, 2002.
  • 繆良云, 『中國衣經』, 上海文化出版社, 1999.
  • 周錫保, 『中國古代服飾史』, 臺北, 丹靑, 1986.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