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봉장(瑞鳳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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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기에 작위를 지닌 여성에게 수여한 훈장.

개설

1907년(광무 11) 3월 30일 칙령 제20호로 ‘훈장조례(勳章條例)’를 개정하여 내·외명부(內·外命婦)의 작위를 가진 여성에게도 수여하도록 제정된 훈장이었다. 훈등은 1등에서 6등까지로 구분되어 내명부와 외명부 중에서 현숙한 덕행과 특별한 공로가 있는 사람에게 황후의 휘지(徽旨)를 거쳐 수여하였다.

연원 및 변천

서봉장은 1904년(광무 8) 3월 30일에 조령을 통하여 대궐의 여관(女官)에게 수여하는 훈장으로 만들어졌다. 1905년(광무 9) 9월 19일에 내·외명부의 작위를 가진 여성에게도 수여하라는 조령이 내려졌고, 1907년(광무 11) 3월 30일에 대한제국 칙령 제20호로 ‘훈장조례’를 개정하면서 제정되었다. 훈장의 명칭과 의미는 예로부터 내려오는 궁중의 예장 봉황관(禮裝鳳凰冠)에서 취한 것이었다. 내·외명부 중에서 숙덕(淑德)과 훈로(勳勞)가 특별한 자에게 황후의 휘지(徽旨)로 1등에서 6등까지의 등차를 두어 수여하였다.

형태

훈장의 형태는 훈1등 서봉대수장의 문채가 금으로 만든 두 마리 봉황이 마주한 쌍봉형(雙鳳形)이고 너비가1치 5푼(약 4.5㎝)이며, 길이는 2치 5푼(약 7.5㎝)이다. 꼭지는 금으로 만든 구룡쌍봉관(九龍雙鳳冠) 모양이고 고리는 금으로 정원형(正圓形)으로 만들었다. 수(綬)는 대수(大綬)로서 너비가 3치 5푼(약 10.5㎝)이며 분홍 바탕에 백색 선을 짜 넣었다. 약수(略綬)의 재질은 금이며 그 모양은 원형으로 분홍색 바탕에 비상하는 봉황의 형상이 새겨져 있고 외변선을 둘렀다. 훈 일등 서봉대수장을 패용할 때는 대수를 오른쪽 어깨에서 왼쪽 옆구리에 두른 다음에 끝 부위에서 교차하여 오얏꽃을 천으로 접어달고 그 밑에 정장을 달고, 부장은 왼쪽 가슴에 달았다.

훈2등 서봉장은 훈1등 서봉대수장의 부장을 겸하였다. 재질은 금과 은이고, 지름은 2치(약 6㎝)이며, 중앙의 문양은 금색의 비상하는 봉황이었다. 봉황 둘레에는 남색 바탕 위로 ‘셔봉부쟝’이 적혀 있고, 그 둘레로 백색 광선이 여섯 방향으로 뻗어 나오며 그 사이마다에 녹색 잎이 배치되어 있었다. 광선의 끝에는 홍색의 별이 원형으로 표현되었다. 뒷면에는 수(綬)가 없는 은 패침(佩針)을 달았다.

훈3등 서봉중수장의 문채의 재질과 모양은 훈1등과 같지만 길이가 1치 5푼, 너비가 1촌이고, 꼭지가 구룡단봉관(九龍單鳳冠), 고리가 타원형이라는 점이 달랐다. 패용할 때는 문채를 정중앙에 끼운 중수(中綬)를 목 밑에 걸었다.

훈4등 서봉소수장은 재질이 모두 금으로 규격과 모양은 훈3등과 같지만 고리가 정원형이었다. 훈5등 서봉소수장은 재질과 규격, 모양이 훈4등과 같으나 고리의 재질이 은이었다. 훈6등 서봉소수장은 재질이 모두 은이고 모양은 훈5등과 같았다. 패용할 때에는 훈4등에서 훈5등까지는 천을 사선꼴로 접은 삼각형의 소수(小綬)로서 왼쪽 가슴에 다는데, 다만 훈4등의 소수 표면에는 천으로 꽃을 접어 다는 점이 달랐다.

생활·민속 관련 사항

서봉장은 ‘훈장조례’를 개정하여 수여하기 이전인 1905년 9월 19일에 내·외명부의 작위를 가진 여성에게도 수여하라는 조령에 따라 같은 해 10월 5일 순헌황귀비 엄씨와 의친왕 이강의 비인 연원군부인 김씨에게 먼저 수여되었다. 이어 1907년 1월 24일 순종의 계후인 황태자비 윤씨에게 수여되었다. 윤씨는 황태자비 민씨가 1904년 사망하자, 1906년 12월에 황태자비로 책봉되어 서봉장을 수여한 것이며, 1907년 8월 순종이 황제로 즉위하자 황후가 되었다.

1907년 3월 30일에 대한제국 칙령 제20호로 ‘훈장조례’를 개정하여 서봉장이 정식으로 훈장의 하나가 된 다음에는 1908년(융희 2) 7월 14일 일본메이지 천황의 황후인 하루코 황후와 요시히토 황태자의 비인 사다코 황태자비, 태자태사 이토 히로부미의 아내인 이토 우메코에게 수여하는 등 수여 범위가 넓어졌다. 1909년(융희 3)에는 일본나시모토노미야 모리마사 왕의 비인 나시모토노미야 이쓰코, 해풍부원군 윤택영의 아내이자 황후의 어머니인 경흥부부인 유씨, 완흥군 이재면의 아내 정경부인 이씨, 의창부부인 남씨, 여은부원군 민태호의 아내 등에게도 수여되었다. 5월에는 벨기에총영사의 부인 마담 레온방갈에게 훈4등 서봉장이 수여되었으며, 9월에는 전선찬사(典膳贊師)를 맡고 있던 손탁에게도 훈4등 서봉장을 내리도록 하였다.

대한제국기에 수여된 서봉장은 총 75개인데 그중 48개는 1910년에 수여되었다. 1910년(융희 4) 8월 21일에는 순정효황후가 행하여, 고(故) 청안군이재순의 아내 정경부인 훈2등 홍씨, 완순군이재완의 아내 정경부인 훈2등 서씨, 태자소사 내각 총리대신이완용의 아내 정경부인 훈2등 조씨 등에게 훈1등 서봉장을, 증 덕안군이재덕의 아내 정경부인 서씨, 증 풍선군이한용의 아내 정부인 홍씨 등에게 훈2등 서봉장을 수여하고, 상궁 백완규·박현식·김석원 등에게 훈5등 서봉장을 수여하는 수여식이 거행되었다.

조선시대 이래 대한제국기에 황후가 직접 누에를 치고 고치를 거두는 의식을 행하여 백성들에게 양잠의 중요성을 인식시키고 이를 널리 알리는 행사를 하였다. 이는 친잠례(親蠶禮)와 수견례(收繭禮)의 의식으로 이루어졌다. 한일합방 이후 이 행사는 수견식(收繭式)으로 약식화되어 행하여졌다. 1924년 순정효황후 윤비는 수원의 잠업시험장에서 양력 5월 13일에 어린누에를 떠는 소잠(掃蠶)을 하고, 창덕궁 주합루 서편에 설치된 친잠실에서 양력 6월 17일에 누에고치를 따는 수견(收繭) 의식을 행하였다. 당시 황후의 친잠례는 국가적인 의례였는데, 이때 수견식을 마치고 찍은 기념사진에는 순정효황후가 복식을 갖추고 서봉장을 착용하고 있어서, 훈장은 중요한 예식을 거행할 때에 착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참고문헌

  • 『황성신문(皇城新聞)』
  • 『청의서(請議書)』,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
  • 『고문화(古文化)』 7, 한국대학박물관협회, 19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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