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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둥근 몸통에 좁고 긴 목이 달린 형태의 그릇.

개설

병(甁)은 조선시대 전 기간에 걸쳐서 다양한 종류의 액체를 담거나 꽃을 꽂는 용도로 사용하였으며, 드물게 쌀은 담는 데 사용하기도 하였다. 병은 재질에 따라 금속제로는 은병(銀甁)·유병(鍮甁)이 있고, 자기제로는 백자병(白磁甁)·청자병(靑磁甁)·자병(磁甁)이 있다. 용도는 주병(酒甁), 수병(水甁), 다병(茶甁), 화병(花甁), 유병 등으로 다양하다. 차를 담은 다병과 화병은 주로 중국의 사신을 접대할 때 사용하였고, 중국 황제나 사신이 조선 왕에게 하사 또는 진상하거나 일본에서 조선에 조공으로 바친 예가 있다.

연원 및 변천

『조선왕조실록』에 나타난 병의 가장 많은 용례는 술을 담는 것이다. 왕이 종친에게 하사한 약주나 성균관과 신하들에게 하사한 술은 내온(內醞) 또는 궁온(宮醞)이라고 하였는데, 병을 내온 또는 궁온을 담는 데 사용한 예로 태종대에 제주만호(濟州萬戶)김천신(金天伸)에게 내온 200병을,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조준(趙浚)에게 궁온 30병을 하사한 내용이 있다(『태조실록』 7년 3월 17일), (『태종실록』 3년 8월 21일). 1417년(태종 17)에 회안대군이방간(李芳幹)이 반란으로 충청도 홍주목에 안치되었을 때에도 태종이 동복(同腹) 형인 이방간에게 약주 30병과 소주 10병을 하사하였다(『태종실록』 17년 4월 24일). 조선의 왕은 특히 성균관에 많은 양의 술을 하사하였는데 태종은 성균관에 술 100병을 하사하였고(『태종실록』 17년 6월 12일), 세조는 술 150병을 하사하였다(『세조실록』 6년 7월 26일).

외교 관계에서 병에 술을 담아 사용한 사례는 중국 명나라 황제가 조선 왕에게, 조선 왕이 일본 왕에게, 그리고 일본에서 조선 왕에게 다양한 종류의 술을 전한 예가 있다. 태종대에 명나라 영락제가 조선 태조의 국상(國喪)을 조문하는 뜻으로 태종에게 보낸 부의(賻儀) 가운데 술 100병이 있었고(『태종실록』 8년 9월 28일), 1410년(태종 10)에 태종이 일본 왕에게 조상(弔喪)하는 뜻으로 청주(淸酒) 100병을 전했다(『태종실록』 10년 2월 4일).

병은 술 외에 조선을 방문한 사신을 접대하며 다례(茶禮)를 베풀 때에는 차를 담는 용도로 사용되었다. 이는 순조대 창덕궁 인정전(仁政殿)에서 중국 청나라의 사신에게 베푼 다례에 다종(茶鍾)과 함께 다병을 사용한 일에서 확인할 수 있다(『순조실록』 즉위년 11월 24일).

오례(五禮)에 속한 의례를 행할 때에도 병을 사용하였다. 1446년(세종 28)에 세종 비(妃) 소헌왕후(昭憲王后)의 장례 의식 중 주다의(晝茶儀)에 다병이 다종과 함께 사용되었다(『세종실록』 28년 7월 19일). 예조에서 정한 죽은 사람을 위하여 재를 올리는 규식(規式)에 여섯 가지의 흰 꽃을 꽂는 용도의 병[左右甁花六用素花]으로도 사용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세종실록』 2년 9월 22일).

병의 재질 중 금속제인 은병은 인조대에 왕이 원창군(原昌君)이구(李玖)에게 은시(銀匙)·은저(銀筯)·은병·은잔(銀盞)을 하사한 예에서(『인조실록』 5년 2월 13일), 유병은 문종대에 영의정부사 심온(沈溫)의 분묘(墳墓)에 사용할 제기(祭器) 가운데 유병이 포함된 예에서 알 수 있다(『문종실록』 1년 8월 11일).

자기제 병은 중국과 일본의 사신을 통해 유입된 외국산의 예로 태종대에 명나라 사신 해수(海壽)가 태종에게 바친 문양이 없는 중국 경덕진산 백자로 추정되는 다병(『태종실록』 17년 7월 21일), 세종대 유구(琉球) 국왕의 둘째 아들 하통련(賀通連)이 세종에게 바친 청자기(靑磁器) 열 가지와 청자화병(靑磁花甁)(『세종실록』 즉위년 8월 14일), 명나라 선덕제가 사신 창성과 윤봉을 통해 세종에게 하사한 백자파다병(白磁吧茶甁) 15개가 있다(『세종실록』 11년 5월 2일). 국내산으로는 정조대에 관요(官窯)인 분원에서 번조한 백자병이 있다(『정조실록』 19년 8월 6일).

형태

양감이 있는 둥근 몸통에 지름이 작아 좁고 긴 목이 붙어 있으며 입구는 밖으로 벌어졌다.

생활·민속 관련 사항

가뭄이 들어 나라에서 기우제를 지내는 동안 집집마다 병에 버드나무를 꽂아두었는데 이를 병유(甁柳)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