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자청화대접(白磁靑花大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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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화코발트인 회회청(回回靑)으로 문양을 그린 대접.

개설

백자청화대접(白磁靑花大楪)은 중국 명(明)나라 황제인 선덕제(宣德帝)의 사신이 세종에게 진상한 중국 청화백자이다. 조선은 개국 직후인 1392년(태조 1) 7월에 명나라에 사절을 보내 예물을 바치고 이성계(李成桂)의 즉위를 알림으로써 사대(事大)의 예를 행하였다. 명나라는 1402년 영락제(永樂帝) 즉위 후에 조선 왕을 책봉하는 고명과 인신을 보내왔다. 이후 조선에는 명나라 황제의 하사품과 사신의 진상품으로 다양한 종류의 중국 자기가 유입되었다.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명대 자기의 유입은 15세기 초 세종 연간에 집중되었다. 특히 명나라 선덕제는 세종에게 모두 다섯 차례에 걸쳐 자기를 하사하였고 그 구체적인 내용이 칙서에 기록되었다.

연원 및 변천

1429년(세종 11)에 조선이 명나라에 진헌(進獻)한 해청(海靑)·매·개 등에 대해 선덕제가 답례의 뜻을 칙서에 적어서 전하고 사신 김만(金滿)을 통해 백자기(白磁器) 15탁(卓)을 하사하였다. 이에 세종과 훗날의 문종인 왕세자가 사신의 노고를 위로하고자 베푼 잔치[下馬宴]에서 김만이 세종에게 백자청화대접 4벌[事]을 진상하였다(『세종실록』 11년 11월 2일), (『세종실록』 11년 11월 2일).

백자청화대접은 백자에 산화코발트인 회회청 안료로 문양을 그린 것으로 형태에 의한 구분인 기종(器種)은 접(楪)에 해당한다. 접은 접자(楪子)로 해석되며(『성종실록』 1년 7월 6일), 재질에 따라 자기(磁器)·칠기(漆器)·유기(鍮器)로 구분되었다. 1450년(문종 즉위)에 명나라 사신 윤봉(尹鳳)이 문종에게 진상한 여러 종류의 자기를 살펴보면, 접자의 크기가 대접(大楪)·중접(中楪)·소접(小楪)으로 구분되었다(『문종실록』 즉위년 8월 6일).

형태

발 또는 사발보다 높이가 낮고 테두리인 구연부가 벌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접자는 뚜껑이 있는 크기가 큰 접자를 의미하는 개대접(蓋大楪)도 있었던 것으로 보아 뚜껑이 있는 것과 없는 것 두 종류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영조실록』 52년 3월 6일).

참고문헌

  • 고미경, 「회암사지 출토 중국 도자기의 연대와 특징」, 『회암사의 도자기』, 회암사지박물관, 2015.
  • 이현정, 「15~16세기 朝鮮 白磁에 보이는 明代 磁器의 影響」, 『美術史學硏究』 제270호, 한국미술사학회, 2011.
  • 이혜정, 「한양도성 출토 15~16세기 청화백자의 조형적 특징과 성격」, 『美術史學』 31, 한국미술사교육학회,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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