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사대준(白沙大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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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백자기로 제작된 대형 항아리.

개설

조선시대에는 관요 분원을 통해 고급 백자가 꾸준하게 제작되었다. 특히 세종 연간에 이르러 왕이 사용하는 자기로서 완전하게 자리매김하였다. 이처럼 고급 백자들은 왕실에서 사용되는 전유물이었으나 백자를 구입하고자 하는 계층이 다양화되면서 점차 사용처와 제작량, 품목 등이 확대되었다. 가장 대중적으로 사용되었던 백자기는 병(甁), 호(壺), 반상기, 제기, 의례용기, 문방구류 등을 들 수 있다. 이 밖에도 조선시대 사료에는 백사대준(白沙大樽), 청화사대준(靑畵沙大樽) 등 각종 백자준(白磁樽)이 등장하여 전 시기에 걸쳐 백자의 제작량과 사용량이 상당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 백자준은 전기와 중기, 후기와 말기에 이르기까지 각 시기별로 독특한 조형미를 지니고 있다. 백사대준은 백자준과 유사한 용도로 생산되었을 것으로 짐작되지만, 문헌 기록이 거의 남아있지 않아 정확한 제작 실태와 양식은 잘 알 수 없지만, 대형 술 항아리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세종실록』에 의하면 왕실 전용품으로 생산된 백자준 일부가 궁 외부의 여러 관사와 관료들에게 하사되기도 하였다고 하니 상당히 대중적인 그릇으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기록으로 미루어볼 때, 당시만 하더라도 왕실이 보유한 백자가 적지 않았음을 알 수 있으며, 왕실 백자들이 왕의 권한으로 궁궐 외부로 유출된 사실을 알 수 있다.

연원 및 변천

백사대준은 일반적으로 대형 항아리의 형태를 갖추었으며, 조선전기부터 중기·후기·말기까지 꾸준하게 생산된 대중적인 백자기였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시기의 흐름에 따라 양식과 유색에서 특징적인 변화를 보인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이와 관련한 문헌 기록은 거의 없으며 『조선왕조실록』에서도 관련 내용은 희소하다. 유일한 기록으로 1447년(세종 29)에 “왕이 성균관에 청화사대종(靑畫沙大鍾) 2벌과 백사대종 2벌, 백사대준 4벌, 술 1백 50병 및 생선과 고기를 하사하고, 술과 고기를 사부학당(四部學堂) 유생들에게 하사하였다.”는 내용이 있다(『세종실록』 29년 9월 1일). 성균관에 대한 애정은 이미 태종대부터 비롯되었는데, 태종은 잠저(潛邸) 때 처음 벼슬하던 곳으로 성균관을 지정하며 유생들에게 청화사대종 등 각종 백자를 하사하였다. 세종대에도 이러한 유지를 받들고자 성균관에 유사한 그릇들과 음식을 내렸다.

형태

백사대준은 항아리 형태로 제작되어 술이나 물 등을 담는 용도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현재까지 『조선왕조실록』에 등장하는 유물이 전해지지 않아 정확한 형태를 파악하기는 힘들다.

참고문헌

  • 강경숙, 『한국 도자사의 연구』, 시공사, 2000.
  • 김영원, 『조선시대 도자기』, 서울대학교출판부, 2003.
  • 방병선, 『왕조실록을 통해 본 조선도자사』, 고려대학교출판부,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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