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주전(綿紬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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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국내산 견직물을 취급, 판매하던 육의전(六矣廛)의 하나.

개설

면주전은 국내산 비단을 판매하는 대신 정부관서의 각종 시역(市役)을 지던 유분전(有分廛)의 하나이다. 후에 중국산 생사(生絲)의 수입 및 판매까지 영역을 확대하였다. 중국산 비단을 취급하는 입전(立廛)과 국내산 면포를 취급하는 백목전(白木廛)에 이어 세 번째로 규모가 큰 시전이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조선시대 시전은 왕실과 정부관서에 필요한 물품을 조달하는 한편 도성민들의 생활물품을 공급하는 시장기구로 기능하였다. 건국 초 정부에서는 시장을 통제하는 정책을 펼치는 가운데 도성에 1,000여 칸의 시전행랑을 지어 특정 상인에게만 상업을 허용하고, 이들에게 상세(商稅)는 물론 왕실의례와 국가행정에 필요한 제반 역을 수행하게 하고 여타의 물품도 제공하도록 하였다.

조선전기의 시전으로는 면주전 외에도 어물전(魚物廛), 목화전(木花廛), 면자전(綿子廛), 마전(馬廛), 모전(毛廛) 등이 확인되지만, 1551년(명종 6) “우리나라의 모든 물건은 모두 시전에 있다[我國百物 皆有市廛]”라는 표현에서 보듯이 도성에 각종 시전이 설립되어 운영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후기 정부로부터 금난전권(禁難廛權)을 부여받은 시전이 늘어나고 한편에서는 이들의 교역활동을 침해하는 난전, 도고상인들이 부상하면서 시전상업체계에 변화가 나타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면주전은 세 번째로 큰 유분전으로 연이은 통공정책 속에서도 금난전권의 혜택을 지속적으로 누렸다. 이로 인해 19세기 면주전의 운영에 있어서의 위기는, 사상(私商)의 성장에서 비롯되었다기보다 금난전권을 부여한 정부와의 조달 관계에서 야기되었다.

조직 및 역할

면주전의 주요 업무는 정부관서와 왕실에 비단을 조달하는 일이었다. 또 대청사행에 지참하는 세폐(歲幣)방물(方物), 청국사신에게 제공하는 예단(禮單), 부산에 거류하는 왜인사절과 막부(幕府)의 장군에게 보내는 예단을 마련해야 했으며, 호조의 요구에 따라 그때그때 납품하는 명주인 토주(吐紬)와 수주(水紬), 상주(上紬)도 진배해야 했다. 이밖에 시역으로서 궁궐이나 종묘, 한성부 등에 수선과 창호지 도배, 세폐 방물의 포장, 국왕의 거둥 시 잡역, 왕실 행사 때 의막 설치 등을 담당하였다.

면주전의 조직을 살펴보면, 면주전 전체의 주요한 운영자금을 관리하는 보용소(補用所), 보폐소(補弊所) 외에 세폐계(歲幣契), 왜단소(倭單所), 수주계(水紬契), 토주계(吐紬契), 상주계(上紬契) 등 물품을 조달, 납품하는 조직과 생식계(生殖契), 무주계(貿紬契), 호장소(護葬所) 등 구성원의 상호부조를 담당하는 하위기구가 다수 운영되고 있었다.

변천

면주전 운영에서의 위기는 1880년대에 이르러 가시화되었다. 19세기에 작성된 『수가책(受價冊)』들을 살펴보면 면주 가격이 급격히 상승하여 정부로부터 지급받는 대금이 원가 이하 수준으로 내려갔으며, 이마저도 정부에서 제때 지급하지 않는 일이 적지 않게 발생하였다. 이에 19세기 후반부터 면주전은 정부조달에 있어 배타적인 영업 이익을 누리기보다, 손실이 누적되는 경향을 보였다. 갑오개혁을 통해 육의전에 허용되던 배타적 특권이었던 금난전권은 소멸되고 공납제 체계는 공식적으로 폐지되었지만 면주전의 견직물 납품은 개항과 한일병합의 격변 속에서 20세기 초까지 지속되었다.

참고문헌

  • 고동환, 「개항 전후기 시전상업의 변화: 면주전을 중심으로」, 『서울학연구』32, 서울시립대학교 서울학연구소, 2008.
  • 박평식, 『朝鮮前期 商業史硏究』, 지식산업사, 2009.
  • 須川英德, 「시전상인과 국가재정: 가와이[河合]문고 소장의 綿紬廛 문서를 중심으로」, 『조선후기 재정과 시장-경제체제론의 접근』, 서울대학교출판부, 2010.
  • 오언 밀러(Owen Miller), 「시전-국가 간 거래와 19세기 후반 조선의 경제위기 : 綿紬廛을 중심으로」, 『조선후기 재정과 시장-경제체제론의 접근』, 서울대학교출판부,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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